정진호 작
유신은 왕을 보며 생각했다, 평안한 얼굴 평생 지켜주고 싶다고
1
정월 밤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늦은 밤에도 비담은 갑옷을 벗지 않았다. 마치 소리가 시야를 해칠 것처럼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땅 가까이 내려앉은 동녘의 기둥별 뒤로 길게 늘어진 흰 얼룩이 언뜻 보였다. 그 얼룩이 별빛을 방해하는 탓에 별들은 서로 분별없이 탁하게 흐르고 있었다. 탁한 빛무리가 기둥별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며 비담은 피비린내라도 맡은 양 코끝을 찡그렸다. 빛깔과 향기가 탁해지는 별의 형세가 재성(在城·월성의 다른 명칭.)의 모습과 다르지 않구나. 비담은 별이 사로국(신라의 옛 명칭)의 위태로움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500년이 넘도록 나라의 주인을 품어왔던 재성은 달 모양과 닮아있었다. 남쪽에 흐르는 남천은 자연 해자가 되어 주인의 마음이 정갈해지도록 재성의 가슴 안쪽을 깊숙이 쓰다듬어주며 흐르면서도 동시에 남동쪽에서 올라오는 적으로부터 높게 솟은 남쪽 언덕을 지켜주었다. 남쪽에 자리한 다른 나라의 것들과 달리 땅의 동남 끝에 자리한 사로국의 주인이 북서쪽의 큰 땅을 향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북향으로 넓게 트인 주작대로는 오직 사로국의 것이었다. 성안의 땅은 넉넉하고 부숭부숭한 것이 잘 말라 있었고, 그 위로 남당과 조원전 그리고 내성 등 수많은 건물은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을 만큼만 화려하고 정갈하며, 거룩하면서도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성 밖으로는 북쪽엔 북형산성, 남쪽엔 남산성, 그리고 동쪽으로 명활산성과 서쪽으로 서형산성이 자리해 넓은 평야 위의 성을 사방으로 지키고 있었다. 소박하고 정갈한 동쪽 끄트머리 땅의 정취와 그것을 담은 신비로운 반달. 그것이 바로 이 땅이 가진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오직 오랜 시간 그것을 지켜온 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비담은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재성의 아름다움은 탁해지기 시작했다. 남천의 물은 때에 따라 넘쳐흘렀고, 성에선 난데없이 썩은 피비린내와 쇠냄새가 진동했다. 물은 성을 지키는 언덕을 위협했고, 피와 쇠의 냄새는 성의 고즈넉한 향기를 헤쳤다. 그것은 저 동녘 기둥별의 형세와 다르지 않았다. 의미를 망각한 전쟁은 매일같이 백성들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렸고, 백성들은 망국의 백성처럼 뜻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렇듯 이곳 동녘 땅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건 모두 성에 자리한 계집년과 패전국의 피가 흐르는 사내 때문이라고 비담은 생각했다.
이태 전 백제는 사로국의 성을 17개나 빼앗아 갔다. 풀밭에 싹이 트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이는 동안 어린 병졸들의 목에는 단단한 화살이 박혔고, 쓰러진 노인의 머리는 백제군의 말발굽에 맥없이 으깨졌다. 하지만 계집 왕은 자신의 유일한 칼인 유신에 관해서는 아무런 처사가 없었다. 애당초 그것은 유신의 선대 서현이 노린 수였다. 서현은 눈이 먼 진평왕으로 하여금 딸을 후계 왕으로 삼게 했고, 충성을 빌미로 늦은 나이에 출세한 아들은 덕만의 곁에 있게 했다. 그건 분명 묘책이었다. 싸우다 죽는 것 외엔 할 수 없는 망국 가야 출신 장수가 계집 왕의 가장 미더운 신하가 되니 양기를 가지지 못한 계집 왕에겐 양기가 생겼고, 패전국의 핏줄엔 사로국의 깨끗한 피가 생겼다. 그렇게 재성은 계집의 것이 되었고, 패전국의 장수는 성내를 제 것처럼 드나들었다. 애당초 왕의 자리도 계집의 것이 되어선 안 됐고, 압량주(押粱州) 땅도 외국인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됐다. 그것은 사로국의 기틀을 흔들고, 실상 본국을 외국인의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다름이 아니었다.
유신은 본디 마음에 자기 자신만 있는 놈이었다. 자신이 사는 것이 먼저고, 이 땅은 그다음이었다. 이 땅의 예나 규율, 형식이나 제도 같은 것은 모두 제 수(數) 싸움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놈이었다. 그에게 사로국의 아름다움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자의 사돈이 되기 위해 여동생을 불태우는 짓도 서슴지 않을 파렴치한 그는 오직 이번 생만이 중요한 족속이었다. 나라를 버리고, 가족을 죽여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벌레 같은 족속. 비열한 유신의 생(生). 그것만 생각하면 비담은 배알이 뒤틀렸다.
얼마 전 병세가 악화된 늙은 여왕과 외국인 장수는 다시 계집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그건 지난 선대의 과오를 거듭하는 짓이었다. 본디 음기가 가득한 재성 땅에는 사내의 양기가 채워져야만 이치에 맞았다. 물이 흐르는 땅에 음기를 뿌리박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으니 그건 역시 시간을 끌기 위한 유신의 계략이었다. 유신에겐 춘추가 장성해 이 땅의 주인이 되고, 결국 가야의 피가 이 땅 위에 널리 퍼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비담은 생각했다.
이미 벌레는 열매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벌레는 열매를 썩게 할 뿐, 열매의 새 주인이 될 수 없다. 흔들리는 별을 바라보며 비담은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을 느꼈다.
비담은 누구보다 이 땅과 저 밤하늘을 사랑했다. 고백건대 그는 왕이 되고 싶은 욕심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는 단지 이 땅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오직 이 땅의 빛과 향을 지키고, 이 사로국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을 따름이었다. 항시 비담은 그것만을 바랄 뿐이었다.
혼탁한 동녘 하늘, 그곳에서 별 하나가 맥없이 떨어졌다.
2
여왕의 눈동자에선 도무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오직 두려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건 비담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마주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대하게 우주적인 사건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 병마와 다투면서도 꿋꿋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왕의 맥없는 동공을 바라보며 유신은 언젠가의 그녀를 떠올렸다.
이태 전 유신은 백제에게 다시 성을 빼앗겼다. 오직 이 땅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살아왔음에도 불초(不肖)한 그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고 수치스럽게 살아있었다. 그는 서라벌에 태어나 오직 서라벌 사람으로 살았음에도 중신들은 그를 가야인으로 여겼다. 아마 그의 얼굴에도 지울 수 없는 핏줄의 흔적이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유신은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은 망국의 핏줄일 수밖에 없다고. 그 무렵 그는 지쳐있었다. 전쟁은 늘 누군가의 복수였다. 저들은 목이 잘린 저들의 아비를 위해 전장에 나서고, 이들은 가슴이 뚫린 이들의 자식을 위해 전장에 나선다. 또 저들의 아들은 저들을 위해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의 가족 또한 이들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 현장은 아수라도(阿修羅道)와 다르지 않았다. 망국의 핏줄은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한 채로 종국에는 이 아수라도에서 살생만을 반복하다 죽음만이 희망인 삶을 살게 되는구나. 유신은 그리 생각했다.
그해 여름 왕은 유신을 내전 앞 연못으로 불렀다. 성의 중앙에서 서쪽에 자리한 작은 인공 연못 주변에는 화려하게 세워진 여러 전각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자주 연회가 벌어졌다. 계집인 왕은 전각에서 벌어지는 연회보다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겼다.
이미 병세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왕은 전과 달리 눈빛이 쇠약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특유의 부드러운 안광은 살아있었다. 그녀는 그 눈으로 지친 유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유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은 오랜 신하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꼭 어미가 토라진 아들의 마음을 알면서 모른 체하듯 왕은 다시 연못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나라를 세운 혁거세 거서간도, 이곳 월성에 터를 잡은 탈해 이사금도 애당초 이 땅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은 그들을 내치지 않았지요." 그렇지요? 왕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유신을 살짝 돌아보았다.
"이 땅은 사람에게 고집을 피우지 않아요. 말을 타고 오든 배를 타고 오든 이 땅은 사람을 아끼지요. 이 땅은 본래 그런 땅이에요. 그러니 계집인 저도 여기 이렇게 서 있고, 그대도 거기 그리 서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 땅이 그래서 좋습니다. 우스운 계집의 상상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 땅의 마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꿋꿋이 지켜져 오래도록 이곳이 갈 곳 없는 이들의 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신은 그녀의 핏줄에 타고 흐르는 그들의 얼굴을 좋아했다. 유난히 큰 어깨와 얼굴. 그 안에는 부드러운 눈매와 작고 아담한 코가 있었고, 그 이목구비를 크고 힘 있는 턱이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그녀의 얼굴이 그에게는 이 땅과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녀의 아버지를 모셨고, 그의 조부는 그녀의 증조부를 모셨다. 그리고 유신 역시 선대의 뜻에 따라 이 땅과 그들의 얼굴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다. 그때의 유신은 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넓고 평안한 얼굴을 평생토록 지켜주고 싶다고.
그때와는 다른 왕의 메마른 어깨가 때에 맞지 않게 유신을 괜한 감상에 젖게 했다.
"떨어졌다지요." 그녀의 목에선 마른 잎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괘념치 마소서. 별들의 일은 별들의 생리대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담은 그것이 제 것이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유신은 차마 입에 담지 않고 있던 소문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왕은 붉은 새가 있었음에도 망했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음에도 쇠하였는데, 고종은 장끼가 우는데도 흥했고 정공은 용과 싸웠지만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덕이 요사함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신은 담담한 어조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여인을 달랬다.
"별의 변괴라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그렇게 말하던 중 유신의 눈에 문득 겁먹은 여인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을 늘어놓더라도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여인은 끝내 두려움 속에서 눈을 감겠구나. 불현듯 그 생각이 그의 살갗을 싸늘하게 감쌌다. 빛을 잃어가는 이에게 사람의 의지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유신은 이내 깨달았다. 그는 그저 그녀가 편안하게 눈을 감길 바랐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남당을 나온 유신의 앞엔 아득히 펼쳐진 밤하늘이 있었다. 유신은 저 하늘 위에 꼭 여인의 자리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리도 고독한 밤. 고개를 들면 작게나마 위로가 될 수 있게.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