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인화의 온고지신] 고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입력 2022-08-25 14:30:00 수정 2022-08-25 16:42:57

생애 여덟 번 좌절 겪은 다산…고통 속에서도 지혜 도달
국가 시스템 문제 통찰한 경세유표…우리 시대에 소중한 빛

다산 정약용에게는 여덟 번의 좌절이 있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는데 아명이 '귀농'이었다. 이 이름부터가 좌절의 산물이다.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남인의 희망이었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절망한 그의 부친은 시골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는 뜻으로 갓 태어난 넷째의 이름을 귀농이라 지었던 것이다.

다산은 자라서 소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재능이 뛰어나서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과에 4번이나 떨어졌고 6년 동안 명륜당 앞마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시대는 대과 합격을 하려면 비싼 강미(수강료)를 내고 '접(接)'이라 불리는 학원에서 고액 과외를 받아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자식이었던 그는 서울살이 집세를 내면서 성균관 유생 신분을 유지하기도 빠듯했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좌절이었다.

다산은 28살에 겨우 급제하여 초계문신이 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을 서학파로 몰아 제거하려는 노론의 표적이 되었다. 임금은 그를 알아주었으나 당시의 정치 구도에서 임금의 뜻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탄핵으로 유배와 좌천이 이어졌고 그의 벼슬살이는 점점 지리멸렬해졌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좌절이었다.

마침내 정조가 죽고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들은 천주교를 신봉한 역적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장살되고 처형되었다. 다산의 셋째 형도 처형되었다. 둘째 형과 그는 먼 남쪽으로 쫓겨나 하늘 끝을 떠도는 유배인이 되었다. 그는 인생에 주어진 가능성 대부분을 잃었다. 집안에서 역적이 나온 이상 자손 대대로 관직에 나갈 길이 막혀버렸다. 이것이 그의 네 번째 좌절이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백성을 살리고 나라에 보탬이 될 실학을 연구했다. 18년의 긴 세월을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여 방바닥에 닿은 발목의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유배지의 다산초당은 습기가 많고 볕이 잘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50세부터 중풍이 생겨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런 유배가 풀리던 날 그는 499권의 책을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다섯 번째 좌절이었다.

1836년 그는 고향 집에서 죽었다. 다산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든 사람은 그를 실패자로 여겼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그가 썼던 책들은 인쇄물로 간행되지 못했다. 자손들조차 그의 이름을 글에 쓸 때는 '열수'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호를 써서 열수 정모(丁某)라고 썼다. 병고를 참으면서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여 쓴 책들을 세상에 읽혀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은 좌절되었다. 이것이 그의 여섯 번째 좌절이었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인물,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한 사람이라는 다산의 저술은 마현리 고택의 골방에 처박혀 좀과 먼지의 구렁텅이에서 잠을 잤다. 그 책들은 찾는 이도, 읽는 이도 없었다. 가끔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찾아와서 목민심서를 베껴 가는 사람이 좀 있었다. 정약용은 1910년 7월 18일 복권되어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한 달 뒤 조선이 망했다. 이것이 그의 일곱 번째 좌절이었다.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가 났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다산의 필사본들이 보관된 마현리 고택은 다른 150여 호의 가옥과 함께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다. 벼락이 쳤고 집들이 무너졌고 소, 돼지, 닭들이 떠내려갔다. 이 와중에 500권이 넘는 다산의 책들을 구한 사람은 5대손 정규영이었다. 그는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는데 고조부님 책이 떠내려간다고 울부짖으며 몸에 새끼줄을 묶고 몇 번이고 소용돌이치는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어 책을 건져내었다. 정규영은 이 일로 병을 얻어 쓰러졌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다산이 이 일을 알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자기 혼자 아무 보상이 없는 공부로 고생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자손손 5대손의 인생에까지 짐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여덟 번째 좌절이었다.

다산의 좌절은 깊고 먹먹한 감동을 준다. 좌절은 고통을 야기하지만 다산 같은 사람들은 그 고통을 껴안아서 평온한 삶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지혜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생명력이 다한 국가 시스템의 문제를 통찰했다.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사람들은 '성군(聖君)'을 찾으며 어느 당파가 정권을 잡느냐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산은 누가 정권을 잡던 국민의 기대는 무너지게 되어 있고 혼란과 부패를 경험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경세유표>를 썼다.

<경세유표>는 정전제를 비롯한 산업구조의 개혁, 어업, 염전을 중심으로 한 노동 개혁, 과거제를 중심으로 한 교육 개혁 등을 다루고 있다. 그 서문에는 다산의 저술 의도를 압축한 유명한 한 문장이 나온다. "터럭만큼이라도 병통이 아닌 것이 없는바 지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

다산의 통찰은 우리 시대에 소중한 빛을 던진다. 우리 시대 역시 문제는 국가 시스템이다. 한국은 중앙정부에 의한 국가 주도적 발전이라는, 과거에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질곡이 되어버린 시스템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정권은 평등을 앞세워 망국적으로 비대한 중앙정부 예산 체제를 만들어놓았다. 현 정권은 지방시대를 천명했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비수도권의 인구 소멸, 지역 산업 위기, 지방의 사회적 문화적 쇠퇴가 심화되고 있다.

2019년 영국 BBC의 한국 다큐멘터리 제목은 '사우스 코리아, 조용한 문화 강대국'이었다. BBC의 예언처럼 2022년 한국은 더 크고 강력해졌다.

2021년 현재 세계 최대의 인공지능 어학학습 앱인 듀오링고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용자는 764만명이다. 한국어는 비아시아권 언어사용자가 가장 많이 배우는 아시아권 언어가 되었다. 한국의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는 특유의 혼성문화로 모든 나라가 따라 하고 싶은 문화산업의 모델을 창조했다. 팬덤 커뮤니티에 직접 게시글을 올린 한류 핵심 사용자는 2021년 12월 현재 조사대상 108개국에서 1억 5660만 명에 이른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불이었다. 202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5,373불이다. 나라가 431배로 커졌는데 국가 시스템은 아직도 1961년의 틀에 머물러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과 예산을 과감하게 지방정부로 이양하고 국가 체제를 재구성해야 한다. 고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이인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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