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형 문화평론가
문화인류학에 이런 금언이 있다. '관습은 지킬 때보다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훨씬 더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이것의 실례는 수도 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총·균·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일화를 한 번 소개해보도록 하자.
젊은 시절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파푸아뉴기니로 현지조사를 떠났다. 그는 현지의 수렵·채집민들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사냥하면서 정글을 파헤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글 속에서 큰 나무 아래 너무나 멋진 야영지를 발견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그곳은 "태고의 신비가 얽혀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밤하늘과 별빛이 얼굴을 드러낼 것"만 같은 장소였다. 그런데 그가 거기서 노숙을 하려 하자 갑자기 현지부족민들이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왜냐고 물어보니 죽은 나무 아래에서는 절대 야영할 수 없다는 부족의 오랜 관습이 있다는 것이었다. 초보 인류학자는 짜증이 솟구쳤다. 현지인들에 최대한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관습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편집증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계적인 석학이 된 다이아몬드는 그때를 반성한다. 그 뒤로 수십 년간 정글을 탐험했던 그는 여러 차례 죽은 나무가 밤사이 쩍 하고 무너져 내려 주위를 초토화시켜 놓은 장면을 목격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1, 2일은 괜찮았을지 몰라도 1천 일 이상을 정글에서 야영해왔던 나는, 만약 관습을 지키지 않았다면 결국 나무에 깔려 죽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반도에도 오랜 세월 지켜온 여러가지 행정 관습이 있다. 이를테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잠을 자야한다'나 '대통령비서실에는 민정수석을 두어서 대통령 친인척이나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감시해야 한다'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현행 정부조직법 이전부터 존재하던 관습이다. 나는 고려나 조선의 왕이 멀쩡한 궁궐을 비우고 민가에서 출퇴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또한 고려, 조선 시대에도 항상 낭사(郎舍)니 우부승지(右副承旨)니 대사간(大司諫)이니 하는 오늘날 민정수석에 해당되는 관직이 '형조판서와는 별개로' 존재해 왔다. 딱 한 번 사간원이 통째로 없어진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연산군 시절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지적했듯 관습을 잠시 어긴다고 해서 하루 이틀 만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윤 정부 출범 후 100일이 지나자 슬슬 '폰트롤 타워'니 '법사주의보'니 애당초 관습만 지켰어도 피할 수 있었을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관습의 보이지 않는 기능을 과소평가했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남동 사저가 완공되면 한 가지 불안은 조금 가실 것이다. 더 나아가 대통령실이 이제 결단을 내려 민정수석도 임명하고 제2부속실도 운영하는 것이 어떨지 싶다. 그런 성가신 보직과 조직이 쭉 있어 온 것이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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