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는 재미로 더위도 잊는다. 드라마나 영화는 우리 삶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 상담할 때 마음을 여는 도구가 되고, 주인공을 통한 대리만족을 얻거나 대처 방법 학습을 통한 치유적 요소가 있다. 드라마 치료, 영화치료는 정신과 영역에서 유용하다. 우영우는 로스쿨 시절부터 어차피 일등은 우영우 라는 별명을 가진 천재 변호사다. 상위 0.1%의 우수한 두뇌를 가진 최강 우영우가 로펌 입사 시험에서 떨어진다. 자폐스펙트럼장애 때문이다.
자폐(自閉) 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걸어 잠근다는 의미로, 외부에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만 몰두해서, 사람을 대하거나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보이는 질환를 자폐 장애라고 한다. 과거에는 자폐증, 레트장애, 소아기붕괴성장애, 아스퍼거 증후군 등으로 구분하였지만, 2013년부터 자폐스펙트럼장애로 명칭을 통일했다. 병명은 달라도 특성은 동일하고, 다만 심한 정도가 수직선상의 어느 위치에 있나 라는 차이가 있을뿐이어서 자폐스펙트럼장애라고 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의 환자 H군을 떠올린다. 그의 행동 방식은 10년간 변함이 없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과/ 볼링/ 봉무 공원/ 기차'부터 말하고 나면 책상위의 달력을 1월 달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간다. 어떤 이는 수년간 병원을 다녀도 좋아지는 게 뭐있나고 한다. 장애인 작업장에 가서 간단한 조립하는 일은 하지만, 혼자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말하는가 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H군은 나와 마주 앉아서 진지하게 대화를 한다. 김성미 마음과 마음 부터 하고 나면,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 애쓴다. '김밥 단무지 갓바위 무서워 버스 버스... 라고. 동행한 장애인 보조 도우미께서 단어 사이에 살을 붙여 주면 멋진 스토리가 된다. 김밥을 사서 버스를 타고 갓바위를 갔는데 계단을 무서워하더라.' 엄마가 걱정하시니 집에 빨리 가겠다고 하고, 원장님 안녕히 계세요~ 어눌하지만 반듯하게 인사를 꼭 한다. 돌아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을까. 직장에서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기분이 상해도 참고 무례한 부탁도 거절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인 것인가. 사람들은 왜 이토록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것일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인사이더가 되려는 욕구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이들의 이타적 행동은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남에게 관심이 없고 참견할 마음도 없는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동물과는 동떨어지지만,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이타주의라는 가면은 쓰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은 부족하고 무능한데, 남들이 자신의 결함을 알아차리게 될까봐 사람을 피하고 혼자 자폐의 공간으로 몸을 숨긴다. 끊임없이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이 얼마나 빨리 오는지, 몇 번째로 초대되는지, 자기는 아예 제외된 건 아닌지, 남의 마음을 읽고 추측하는 수신 안테나가 쉬지 않고 작동한다.
식사 메뉴마저 맘대로 고르지 못하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간다. 배탈이 나도 말이다. 우울할 때도 사람을 피한다. 몇 달씩 외출도 하지 않고 가족과도 말문을 닫는다. 창피한 감정은 대상이 있을 때 느끼는 것이라면, 죄책감은 대상이 있거나 없거나 느끼는 감정이다. 우울한 사람은 남에게 했던 말에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사회불안증이 있는 사람은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봐 걱정한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훨씬 불행한 시간을 보낸다.
나의 오랜 환자 H군은 김밥을 좋아하지만 단무지는 너무 싫어한다. 김밥을 주문할 때 단무지는 반드시 빼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기호를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그가 너무 대견하다. 좋고 싫음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그의 주장이 자폐 장애의 고집이라고 보이지 않고 강한 자아(self)를 가진 것으로 보고 싶다.
혼자되는 것이 두려워 정작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수없는 모임으로 에너지를 허비하고 결국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고 짜증스런 세상 때문에 지칠 때, 쉴 안식처는 있기나 한 걸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막막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게임 롤(LOL)의 서포터처럼 도와주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푸른 바다에서 늘씬한 몸매로 힘차게 차오르며 우영우에게 활력과 아이디어를 선사한다. 우영우는 고래와 대화하기 위해 심연의 방으로 들어갈 때 가장 행복해한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도, 딸을 위해 인생을 날려버린 아빠의 지친 얼굴도 잊어버리는 순간이다. 새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절대로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곁을 지킨다는 고래가 그녀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였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고독한 사람을 내버려두어라. 그는 신을 만나고 있다'라고 했다. 가끔 나의 자폐의 방으로 들어가 나 자신과 대화하며, 우영우의 고래처럼 영혼을 채워주는 시간을 가진다면 인생의 많은 고뇌가 해결되지 않을까. '내버려두어라 우영우는 고래를 만나고 있다.' 나는 그의 자폐의 방이 부럽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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