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전 정치부장
서문시장 칼국수 골목 상인들의 낯빛이 어둡다. 폭염의 괴로움도 있겠으나, 진짜 이유는 밀가루 가격 폭등에 따른 수익 감소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밀가루값을 끌어올렸다. 2020년 기준 밀 수출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러시아이고, 우크라이나가 5위다. 두 나라 간 다툼에 서문시장 국숫집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분쟁 속 두 나라 가운데 한국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이다. 인지상정으로 침략받은 약자국(우크라이나) 손을 들어 주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한 유명인은 개인적으로 출국해 용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러시아를 공적으로 삼을 순 없는 일이다. 수출 주도국인 우리 입장에선 유라시아라는 큰 시장을 잃을 위험성이 높은 데다 러시아발 가스, 원유 등에 대한 수입 루트가 막혀 버리면 국내 산업은 올스톱 위기에 처한다. 유럽 대륙의 거대한 '가스 저장고'인 러시아는 겨울까지 전쟁을 끌고 간다면 자국 가스를 공급받고 있는 유럽 나라들이 그들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 확신하는 상황이다.
세계 각국의 분쟁 속에 우리는 어느 나라 손을 들어야 할까? 답은 생각보다 쉽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나라다. 이익에 눈이 멀어 비정하다는 비판이 따를 순 있겠으나 열강에 둘러싸여 소멸 위기에 처한 조그만 반도 국가의 선택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해방 이후 한 번도 완벽한 실리 외교를 해 본 적이 없어 보인다. 외교 정책 수립 시에 항상 정치 논리와 이념 문제가 주입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은 보수 정권이 득세하면 한-미-일 관계만 의식하며 발전시켜 나간 반면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온통 관심사가 북-중-러에만 쏠려 있었다.
지난 문재인 정부까지 이 같은 외교 기조가 반복되면서 우리는 '한-미-일 vs 북-중-러'라는 전통적인 동북아 정세의 고정 개념 틀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같은 전통적 동북아 정세 신봉 기조는 우리 외교 문화를 퇴보시켰으며 국익에 있어서도 해악 요소였다.
지금이라도 철저한 실리 외교를 펴기 위해서는 고인이 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가 시작한 북방외교를 곱씹어 보면 지금의 외교 허점을 보완할 수 있어서다.
군인 출신의 노 전 대통령은 6공화국 보수 정권의 수장이었다. 그런 그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중국과는 6·25전쟁 이후 단절된 수교를 맺는 결과를 도출해 냈다. 전통적 보수 정당의 정치적 노선을 과감히 탈피한 혁신적 행보였다.
'노태우 북방외교'의 성과는 7·7 선언 등 단순한 역사적 실적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의 외교는 대북 관계 발전이 자신들의 전리품인 것처럼 자랑하는 진보 정권에 '햇볕정책' 시발점은 보수 정권이었다는 점을 각인시켜 줬다. 또 한-미-일 관계 유지만을 꾀하는 보수 세력에는 대북 관계도 보수가 쌓아 온 유산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북방외교'의 진짜 업적은 보수와 진보가 관성적으로 지닌 '전통적 동북아 정세'에서 탈피해 진정한 실리 외교를 펼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이제 보수는 대북관의 이해도를 넓히고, 진보는 미국과 일본을 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한다. 그게 노 전 대통령이 진짜 바랐던 노림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부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서문시장 칼국수 아지매의 얼굴도 조금 더 밝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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