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형 문화평론가
"난 전쟁터에서 열다섯 명을 죽였다. 다시는 나를 무시하지 마라." 이안 감독의 '라이드 위드 더 데블'에 나오는 주인공 제이크의 대사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자들이 군 복무 시 있었던 일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일이 있었는데, 몇 순배 돈 차에 그쪽 이야기가 나오니 너나 할 것 없이 무용담들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먼저 수색대였던 친구가 DMZ 비트 구축으로 스타트를 끊자, 특전사 군의관이 레바논 근무로 받아친다. 702특공은 인상을 쓰면서 침묵하는 것으로 자기 군 생활의 혹독함을 드러내는가 하면, 포병은 백린탄을 쏴 본 이야기를 꺼내며 겨우 균형을 맞춘다. 이런 화제가 돌 때마다 난 항상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조용히 듣고만 있다. 그리고 녀석들의 과시가 낮아들고 나면 난 조용히 내 군 생활 이야기를 꺼낸다.
난 강원도에서 복무하긴 했지만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군 생활 내내 조용히 지낸 편이었다. 그러다 전역을 몇 개월 남겨 뒀을 무렵, 내 업무를 인수인계 받을 조수 하나가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된다. 크지 않은 키에 동그란 안경을 쓴 귀여운 상. 전혀 야전군인 같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랄까. 그러나 녀석은 영민한데다 성실하기까지 해서 행정병 조수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신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불쑥 난데없는 제안을 해왔다. "박 병장님, 우리 중대에 중대가가 없는데 우리가 한 번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난 그가 대학가요제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고, 며칠 뒤 녀석은 뚝딱 악보 한 장을 그려왔다. 보통의 군가와 비교하자면 조금 서정적이긴 했지만 꽤 괜찮은 멜로디 같았다. 난 대충 가사를 만들어 붙이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수십 년째 중대가가 없던 우리 HQ에도 어엿한 중대가가 생기게 되었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 "얼마나 군 생활을 만고 땡으로 했으면 가사 쓴 걸 자랑하냐?" 친구들의 시큰둥한 반응이 이어지지만 난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그 뒤 난 전역을 했고, 내가 중대가의 가사를 썼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난 우연히 TV를 보다가 어디서 많이 본 안면을 발견하는데, 가만히 보니 그는 그때 내 조수 녀석이 분명했다! 난 흥분한 채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임영웅의 '이젠 나만 믿어요' 등 총 700여 곡을 저작권 협회에 등록…',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저작권 수입 1위…',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음악 작곡가…'.
거기까지 말하고 나면 좌중은 깜짝 놀라며 다들 "그게 진짜냐?"하며 물어온다. 나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나는 군대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 조영수와 함께 군 사기 앙양을 위한 군가 창작 활동에 전념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무시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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