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동유럽 기행

입력 2022-06-23 11:21:24 수정 2022-06-25 06:41:1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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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기행(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동유럽 기행(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백년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가 '철의 장막'이 갓 드리운 동유럽과 소비에트연방(소련)을 두루 다니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여행 에세이가 출간됐다.

'동유럽 기행'은 1950년대 말, 20대 젊은 작가이자 기자이던 마르케스가 공산주의 진영을 3개월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서독에 머물던 마르케스는 프랑크푸르트의 한 카페에서 동독을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특히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자이던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한 비판연설을 하고,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는 격변이 일어난 터라, 동유럽과 소련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겼던 그는 실제 사회주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이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이라 국경을 통해 동독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열려있었다.

마르케스는 새로 뽑은 프랑스제 자동차를 타고 그의 유쾌한 친구들과 이내 동독 국경을 넘어 철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 즉흥적인 결정은 마르케스가 동유럽과 소련을 다니며 남긴 기사이자 기록이 됐고, 한 권의 책으로 엮이게 됐다.

"'철의 장막'은 장막도 아니고 철로 돼 있지도 않다. 그것은 빨간색과 흰색으로 칠한 나무 방책인데, 꼭 이발소 간판 같다. 그 장막 안에 석 달 동안 머무르고서, 나는 철의 장막이 정말로 철의 장막이기를 바라는 건 일반 상식이 모자란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철의 장막은 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가 채택한 정치적 비밀주의와 폐쇄성을 자유주의 진영에서 풍자한 표현이었다. 저자는 특유의 간단명료하고 재치 있는 글솜씨로 동유럽 국가 한 곳 한 곳의 특징을 풀어낸다.

저자는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정치 체제가 영향을 미친 각국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냉전 최전선이었던 베를린 여행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은 여전히 전쟁으로 인한 그을림과 상처를 추스르지도 못한 채, 각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저자는 두 체제의 '무료 견본품'으로 이뤄진 도시를 둘러보며 기괴함을 느낀다.

저자는 사회주의의 영토 안에서 자본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서베를린에 들어서자 '가짜 도시'라는 인상을 받는다. 당시 미국의 관광객들은 여름이면 서베를린에 들이닥쳐서 공산주의 세상을 엿봤다. 이들은 이곳에서 미국산 수입품 쇼핑도 즐기는데, 가격이 뉴욕보다 싸다. 미국 최고 수준의 호텔도 하루 숙박비 1달러 수준이었다.

"서베를린이 자본주의 선전을 담당하는 거대한 기관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의 역동성은 경제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환상적인 번영이라는 겉모습을 제공하고 동독을 당황하게 만들려는 계획적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공산주의 진영에 속한 동베를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위생시설도 없고 상수도도 없이 비루하게 사는 동베를린 사람들을 보고 서베를린과는 달리 경제 현실을 반영한다고 평가했지만, 이후 '스탈린 거리'를 보고선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 거리는 온갖 석상과 대리석 기둥, 벨벳을 씌운 가구들로 넘쳐났다. 스탈린 거리 밖의 대중들이 다락방에 포개져 사는 것과 극명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서베를린의 역동과 박력에 대해 사회주의는 스탈린 거리의 거대하고 괴상한 건물로 응답한다. 스탈린 거리는 규모뿐 아니라 조잡함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모든 양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목한 점은 모스크바의 건축 기준에 부합한다. (중략) 그들은 석상과 대리석, 우단과 거울에 쓴 돈이면 도시를 품격 있게 만들고도 남았을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유명인이 아니었던 마르케스는 동유럽 여행에서 민중의 자연스러운 세계에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다. 소련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돼 공포에 떨면서도 뒷골목 주점에선 활기를 잃지 않은 헝가리 사람들,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의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소비에트연방의 사람들 등 당시 동유럽 국가의 사람들의 특징을 날랜 솜씨로 그려낸다.

이 책에는 그들이 처한 기이한 현실과 말 없는 체제 순응, 그럼에도 진실과 자유를 간절히 원하는 모습이 짠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담겨 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으로 판단하겠다는 저자의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질과 날카로운 통찰도 드러난다. 244쪽, 1만6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