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가면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풍족한지 알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돈 얘기를 하는지, 얼마나 크고 빠르고 비싼 것을 좋아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새것으로 바꾸며 사는지도 깨닫게 된다. 이제 우리는 '절약'과 '절제'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 같다.
영국친구 린튼이 매년 옥스퍼드 대학의 강의실을 빌려서 어머니, 동생, 아내, 아이들과 함께 연주하는 가족음악회를 여는 것도 놀라운데, 집에서 구운 케이크로 차린 뒤풀이 상차림이 너무 소박해서 또 놀랐다. 우리는 늘 '대접'하느라고 또 '체면' 차리느라고, 이왕이면 크고 좋은 걸로 많이 차리지 않나? 한국에 시집온 일본친구는 제일 이해 못할 한국문화가 남을 줄 알면서도 언제나 너무 많이 만드는 제사음식이라지?
영국인은 우리처럼 후딱후딱 부수고 새로 짓지 않는다. 이사를 싫어해서 오래도록 살던 집에서 예전그대로 산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그들이 얼마나 '닥지닥지 붙은 오래된' 집에서 사는지, <로맨틱 홀리데이>에서는 얼마나 '작고 불편한' 집에서 사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앤티크 가게와 시장에서는 골동품뿐만 아니라, 냄새나는 헌옷, 깨진 안경, 녹슨 연장 같은 별거 아닌 것까지도 판다. '어릴 적 인형'이나 '할아버지의 상자' 같은 낡아서 망가진 물건을 수선해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은 감동하며 눈물을 훔친다. 버스 정류장에는 감정이 어린 물건이라 소중하다면서 잃어버린 물건을 애타게 찾는 글과 사진이 붙어 있곤 한다.
영국인은 2차 대전의 내핍을 기억해서 아직도 근검절약한다. 설거지할 때는 물을 받아 한꺼번에 씻고 수돗물에 헹구지 않고 행주로 닦는다. 다 먹은 과자상자나 은박지는 다시 쓰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채리티샵(자선단체가 운영하는 상점)에 기증하고, 빗물은 모아서 꽃과 나무에게 준다.
우리 가족이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200년이 되어서 마루와 침대가 푹 꺼졌고 삐걱거렸다. 샀던 중고차의 창문은 손으로 열고 닫아야 했고, 에어콘은 없었다. 살았던 집은 작았고, 히터는 따듯하지 않았으며, 수도꼭지는 찬물과 더운물이 각각이라 온도조절이 어려웠다. 냉장고는 세탁기만해서 가득 채워놓아도 금세 텅 비었다.
30여년을 지켜보았는데도 그들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스위치를 켜고 화면이 뜰 때까지 기다리는 텔레비전과 몸 전체를 밀고 당기는 무겁고 시끄러운 진공청소기를 지금도 사용한다. 외식은 비싸고, 배달음식은 없고, 늦도록 여는 상점과 식당도 없다. 물가는 비싸도 생활필수품과 식품은 저렴해서, 게다가 냉장고가 작아서, 집에서 신선한 음식을 먹었다.
미국에 사는 아들네가 수년 만에 한국에 왔다. 아들이 "필요한 건 다 있고, 주문하면 신속하게 문 앞까지 갖다 주고, 아프면 곧바로 병원에 갈 수 있다."며 새삼 감탄할 때, 나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국은 분리수거를 대충대충 하는데, 우리는 철저하게 하네."라며 놀랄 때, 나는 영국인이 그러듯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게 혀를 쯧쯧 차며 나무랐다.
며느리로부터 생일선물로 최신식 헤어드라이어를 받았다. 이제 "격식으로 하는 선물은 하지 말고, 생각날 때 마음으로 하는 선물만 하자."고 했는데, 내 구식드라이어를 보고 마음이 쓰였단다. 잘 버리는 게 다가 아니었다. "헌것은 어떻게 하지?"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필요한 물주전자로 대체했다.
영국친구 스텔라와 이런 얘기를 나눈 적 있다. "우리 모두 환경을 생각해서 불편을 감수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시대가 올 거다."라고. 새 드라이어를 사지 않았다고 해서, 또 다른 쓰레기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굳이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이제는 너무 쉽게 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건 나 스스로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고, 시대정신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문화칼럼리스트
댓글 많은 뉴스
국힘, '한동훈·가족 명의글' 1천68개 전수조사…"비방글은 12건 뿐"
사드 사태…굴중(屈中)·반미(反美) 끝판왕 文정권! [석민의News픽]
"죽지 않는다" 이재명…망나니 칼춤 예산·법안 [석민의News픽]
"이재명 외 대통령 후보 할 인물 없어…무죄 확신" 野 박수현 소신 발언
尹, 상승세 탄 국정지지율 50% 근접… 다시 결집하는 대구경북 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