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규의 행복학교] 때로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

입력 2022-06-03 13:30:00 수정 2022-06-03 17:59:43

최경규

서울에 놀러 온 경상도 사람들이 "억수로 좋다 카니까" 라는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중학생들이 그들을 일본사람인 줄 알았다는 우스갯소리, 경상도 방언 중에 '억수로'라는 말이 있다. 억수로라는 뜻을 아는가? 의미를 생각해보면, 억수같이 비가 많이 온다는 말이 있듯, 즉 많다, 상당하다는 말로 추측된다.

삶에 지친 사람들, 때로는 나에게 "억수로 행복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그가 내뱉는 한숨의 이면에는 '나 지금 억수로 힘드니 잠시라도 쉬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묻어 있다.

힘듦에 대하여 독일의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는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라고 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고통이라는 단어 대신 다른 단어, 즉 행복이나 즐거움이란 말을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최소한 시인 에리히보다는 나은 삶을 산다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신(神)으로 태어나지 못한 우리 인간은 그가 말했듯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주기를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슬픔과 괴로움을 이겨내고, 때로는 고통을 외면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처음 고통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 엄마의 안전했던 배 속을 나오며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 지금까지와 다른 환경, 큰 충격에 놀라 울음을 낸다.

◆행복과 기쁨의 그림자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그늘

비록 그 순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 시간부터 우리는 치열한 삶과 마주한다. 너무 비약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에리히가 말했던 논리에 따르자면 언제나 고통은 삶과 동반하였고, 다만 행복과 기쁨이라는 그림자가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 때면 고통이 덜 느껴질 뿐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고통에서 멀어지기 위한 노력. 인간이라면 무의식중에 누구나 하게 된다. 일하다가 힘들 때 막걸리 한잔을 하기도 하고, 늦게 마친 야근 후 집에 돌아와 혼자 먹을 수 없을 만큼의 양을 주문하여 폭풍 흡입을 하기도 한다. 잠시의 고통은 그러한 방법으로 본질적 해결이 아닌 임시방편으로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찾아온 두통이나 더 두꺼워진 뱃살을 보면서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악순환을 거치는 것도 고통의 또 다른 시작이다. 매일 새벽, 나는 산책하러 나간다. 어쩌다 비가 오는 날은 아이들의 알록달록한 비옷을 입고 공원을 향한다. 잠이 덜 깬 사람들, 땀을 흘리며 뛰는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열심이다.

그러다 지난달부터 어느 여성 한 분이 자주 눈에 보인다. 운동복이라기보다는 골프복이나 무대복과 같은 밝은색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 마침 내가 스트레칭을 하던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물 뒤편이라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잘 보였다. 혼자 밝은 음악을 틀어놓고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약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온 마음을 그 시간에 몰입하고 있다.

아마 그 순간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있는, 동네 사람들도 제법 있을 터인데 왜 그렇게 자신만의 시간을 온전히 쓰려고 전력투구하는지 이유가 궁금하였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마주친 동네 어르신에게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구체적인 병명까지는 모르지만, 몸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 같지 않았다고 했었던 그녀였지만 최소한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남들의 시선 위에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듯하였다.

◆이길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선배인 한 소설가가 있다. 삶이 그를 속여 10여 년 전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한 적이 있다. 암 선고를 받았던 그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이야기는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힘겹게 하였다. 선배는 얼마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의 병원 치료는 빠듯한 살림에, 남은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줄 뿐이고 남은 생은 사랑하는 자식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 선배가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입장이었다면 그런 생각의 범주에서 머무르며 같은 결정을 내렸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그에게서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된 사실, 그는 기적적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여전히 함께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맑은 공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욕심 없이, 그리고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숨 쉴 만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어떤 이가 말한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 삶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감히 고통이라는 말을 쓰라고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두 사람의 고통보다 혹여라도 더 무거운 마음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나는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이길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더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가위에 눌린 새벽, 깨려고 더 노력하면 할수록 더 힘들듯이 말이다. 무조건 고통이 나쁜 것이라 터부시하고 멀리해서는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든 현상파악이 중요하기에 고통의 본질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의 시간 역시, 삶의 일부분으로 아름답게 함께 숨을 쉴 수 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발생한다. 그러기에 오늘의 고통을 고통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내 삶,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줄 교훈이자 귀한 경험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지금의 고통을 잘 이겨내어야 다음에 올 고통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잘 피해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쉽게도 고통의 무게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나의 아픔이 다른 이들보다 10배 더 클 수도 있다. 소위 말하는 산전수전 겪은 내공을 가진 사람의 고통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가벼울 수밖에 없다. 내공을 현금지급기와 같이 입출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내공은 그야말로 세월의 흐름에 인내심을 가지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괜찮다. 때로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 내려놓고 삶이란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도 말이다. 살아보니 모든 것은 지나가는 찰나이며, 순간이다. 그 순간들의 이어짐이 바로 삶이다. 삶을 때로 무겁다고 느낀다면 차라리 내려놓고 다른 어떤 것에 몰입하는 것은 어떨까?

소위 말하는 노력이라는 것을 제대로 한번 해 볼 때가 되었다. 대학 기말고사도 아니고, 취업을 위한 면접시험도 아니다. 진정한 삶, 아름다운 내 삶의 후반기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행복으로, 삶의 시각을 변화시킬 노력이 필요하다.

최경규

행복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