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윤하 시인
가르치지 않아도 깨닫게 한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
24살, 처음 부임한 학교는 김천의 여고였다. 나는 과학교사임에도 첫 수업을 시로 시작했다. 열정으로 가득 찬 서툰 교육자는 얼마나 위험한지! 교무실에 3일 무단결석한 학생에게 걱정 어린 훈계를 했다. 그 학생의 태도는 매우 건성이어서 논리를 갖춘 훈계의 목소리는 커졌다. "선생님이 공부 선배일지 모르나 내가 인생 선배거든요." 그녀가 던진 한마디였다.
일 년 후, 학생들이 자전거 타고 냇가에 놀러 가자고 했다. 한 명이 선두, 서툰 나는 두 번째, 네 명은 뒤에서, 나란히 시골길을 달렸다. 앞서가던 버스가 정차하자 선두 아이가 뒤돌아보며 '옆으로!'라고 수신호했으나 버스에 쾅 부딪혔다. 뒤따라오던 아이들이 흙을 털어주며 큰언니처럼 행동했다.
황간의 계곡은 넓고 얕고 시원했다. 수학여행도 간 적 없는 내겐 신나는 하루였다. 온몸이 푹 젖어 달라붙은 옷과 새파래진 입술로 햇빛에 달구어진 강변에 머리를 맞대고 둥글게 누웠다. 아이들이 수다를 떨며 얘기하는 중, '3일의 무단결석'은 중절 수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인생 선배! 공부만 한,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 그날 학생들이 담임선생에게 가르친 것은 인생이었다.
내가 여고 1년 때 유모 국어 선생님께서 처음 부임했다. 그녀는 칠판에 시를 써서 낭송했다. 검은 안경테를 검지로 살짝 올리시며 '시 한 편은 꼭 외워야 한다'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녀가 감성을 불러일으켰던 김남조의 시들은 아직도 내 심장에 각인되어 있다.
"만산 피 같은 홍엽/ 만산 불같은 홍엽/ 만산 그리움 같은 홍엽'-'태양의 각문" 일부,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 때문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 감고 입술을 대는 밤"-'가난한 이름에게' 일부.
시의 서정이 나의 어둠을 톱니처럼 헤집다가 뇌성마비아의 투명한 눈빛과 만나 불꽃이 튀고, 불혹이 되기 전 시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교수와 사업, 사회활동을 모두 접고 시에 집중한 후 지금까지 시를 품고 사는 계기이다.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세 살 터울의 언니다. 그녀는 공부를 참 잘해서 가난한 경제를 뚫고 국립사범대학을 수석 졸업했고 대도시의 중등교사로 발령이 났다. 나는 그녀가 걸어가는 발자국 위에 내 발바닥을 얹었다. 그녀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전 생애를 가르친 스승이다. 몸이 약한 그녀는 나를 언니 같은 동생이라고 한다. 나는 늘 언니 같은 마음으로 걱정이 산더미 같은 심정이지만 그녀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 세상을 통과했다. 딱 한 발짝씩 먼저 세상을 검증하고 먼저 늙어가고 있다.
누가 먼저 죽을지 알 수 없으므로 최종적으로 누가 좋은 스승이 될지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스승께 감사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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