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 홍준표의 '면박 기자회견', 팬덤 정치의 명암

입력 2022-04-04 09:37:35

"시장 되면 사퇴할 것" 법적으로 불가능한데도
"기자들 뭘 몰라" 욕설 섞어 비난한 지지자들
면박 기자회견 뒷받침한 건 극성 팬들 존재였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 31일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대구시장 출마 선언을 한 후 지지자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다. 그는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 31일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대구시장 출마 선언을 한 후 지지자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다. 그는 "대구시장이 되면 가장 먼저 시정개혁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아직 시장도 안 됐는데 무슨 국회의원을 사퇴하라고 합니까. 그건 난센스죠."

홍준표 의원(대구 수성구을)이 언짢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지난달 31일 대구 수성못 상화시비 앞에서 열린 대구시장 출마 기자회견에서다.

홍 의원의 출마로 보궐선거 가능성이 생겼고, 그의 의원직 사퇴 시점에 따라 선거 시점도 갈리는 상황이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홍 의원은 "시장이 되면 사퇴하겠다"고 말했고, 여러 차례 추가 질문에도 같은 맥락으로 대답했다.

홍 의원의 발언은 주변을 당혹 스럽게했다.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너무나 태연하게 쏟아냈기 때문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국회의원 등 현직 선출직이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면 5월 2일까지는 사퇴해야 한다. 또 현직 선출직 공직자에겐 직을 사퇴해야 공천장을 주기로 한 국민의힘 방침과도 맞지 않았다.

김근우 정치부 기자
김근우 정치부 기자

그러나 수성못에 운집한 지지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오히려 "기자라는 게 뭐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고성을 질러댔다. "질문 수준 좀 봐라",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라며 욕설 섞은 비난을 가했다. 홍 의원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지었다.

결국 뭘 몰랐던 건 홍 의원으로 밝혀졌다. 당일 저녁 홍 의원은 페이스북에 "대선과 착각해서 한 말이었다. 본선 후보가 되면 사퇴 시기를 검토하겠다는 답변으로 정정한다"고 해명했다.

이 답변을 제외하고도 홍 의원은 이날 회견에서 질문자에게 '면박'을 주는 답변을 쏟아냈다. 평소보다 공격적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과 대구시의 예산정책협의회에 지역 의원으로 유일하게 불참한 이유를 묻자 "있는 줄도 몰랐다. 자질구레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맞받았다.

대구시장 당선 시 연임 가능성을 묻자 "이번에 될 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건 질문도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통합신공항 이전 이후 동구의 발전 방향을 묻는 질문에는 "회견문 다시 확인하고 오라"고 지적했다.

홍 의원 특유의 직설화법에는 나름대로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또 '사이비 기자'나 유튜버들이 괴상한 질문을 하는 데 진절머리를 내온 터라 조금은 통쾌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더 당혹스러웠던 건 회견장을 둘러싼 홍 의원의 지지자들이었다. 답변이 이어질 때마다 환호하며 질문자를 비난했다. 한 젊은 기자가 질문을 시작하자 큰 소리로 "아이고, 기자랍시고 어린 얼라가 나와가지고 저게 뭘 알겠노?"라고 외치기도 했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 31일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대구시장 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그는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 31일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대구시장 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그는 "대구시장이 되면 가장 먼저 시정개혁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홍 의원의 '면박 기자회견'을 뒷받침해준 건 결국 그 지지자들 아니었을까. 사실도 아니고, 도리어 부메랑으로 날아올 발언임에도 그렇듯 자신있게 쏟아냈던 건 무슨 말을 하든 환호해주는 팬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법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로 몰아붙이던 홍 의원, 그리고 욕설을 퍼붓던 지지자들의 모습에서 얼핏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스쳤다. '문파'로 상징되는 극성 지지층에 둘러싸여 '문자 폭탄'을 '양념'이라고 추켜세우던 모습이 홍 의원에 오버랩됐다.

상대 진영이나 경쟁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 혐오를 양산하고, 무비판적 지지로 정치를 퇴행시키는 이른바 '팬덤 정치'가 정치권을 지배한지는 꽤 됐다. 그런데 그렇게 팬덤에 기댔다 불행해진 정치인들도 셀 수 없다는 점에서 대구시장 유력 후보로 손꼽히는 홍 의원의 기자회견은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구시장 후보로서 홍 의원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만약 그가 시장이 된다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시정이 이날 회견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길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