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화성산업, 27년 전 그날

입력 2022-03-14 20:11:37

김해용 논설실장
김해용 논설실장

1995년 대구를 들썩인 사건이 발생했다. 도박 빚에 쪼들리던 건설회사 임원이 일당 6명과 공모해 대구의 대표적 기업인 화성산업㈜의 이홍중(당시 46세) 건설 부문 사장을 납치한 뒤 가족에게 5억 원을 요구한 사건이다. 당시 화성산업의 대표이사이던 이인중(당시 51세) 화성산업 명예회장은 동생 피랍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헬기까지 동원해 가며 신속 수사에 나섰다. 몸값을 받으려고 현장에 나타난 범인들은 사건 발생 10시간 만에 검거됐고 이 사장은 무사히 풀려났다.

사건 이후 지역사회에서는 이인중·홍중 형제간 우애가 화제가 됐다. 충격과 공포 속에서도 가족들은 경찰 신고를 결정했고 그 중심에 이 명예회장이 있었다. 아무리 부잣집이라 해도 5만 원권이 없던 시절 현금 5억 원을 단 몇 시간 안에 확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들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한 것은 결정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유상하고도 무정한 게 세월이라 했던가. 차량 트렁크에 갇혀 10시간 동안 생사의 공포를 넘나들던 동생, 동생을 구하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형…. 27년이 지난 지금 두 형제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화성산업 경영권을 놓고 주주총회에서 물러설 수 없는 표 대결을 벌이는 것은 물론이고 형사고소고발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 모습을 지역 경제계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화성산업은 1958년 9월 설립된 이래 갖은 풍파와 위기를 견뎌내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화성산업만큼 지역 친화적 경영을 해온 회사도 드물다. 그래서 지역민 관심이 크다. 1997년 대구종합금융의 경영권을 외지 업체가 장악하려 하자 화성산업이 나섰다. 대구종금을 지키자는 지역 여론에 총대를 멘 것이다. 여기에 화성산업은 무려 500억 원을 투입했다. 경영권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IMF 외환위기로 대구종금이 문을 닫는 바람에 화성산업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화성산업은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 풍파도 겪었다. 1999년 기업이 공중분해될 위기 속에 화성산업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이듬해 워크아웃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창업주인 고 이윤석 회장과 이인중 회장은 회사를 살리겠다며 50억 원의 사재를 내놨다. 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화성산업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건설 경기 침체로 경영난에 몰리자 화성산업은 유통 사업(동아쇼핑·동아백화점)을 매각해 유동성 위기를 넘겼다. 당시 유통 부문은 흑자를 내고 있었다.

화성산업은 백화점과 아파트 건설을 함께 운영하던 기업이었다. 유통은 이인중, 건설은 이홍중 체제였다. 하지만 2010년 화성산업이 유통 부문을 매각함으로써 경영권 분쟁이 싹텄다. 특히 3년 전 이인중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이홍중 사장이 회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이인중 회장의 아들이 사장이 된 이후 삼촌과 조카 간의 경영권 갈등이 시작됐다고 지역 경제계는 보고 있다.

양측의 경영권 분쟁은 오는 31일 주주총회를 통해 결판날 것으로 보인다. 진 쪽은 물러나야 하지만, 양측의 우호 지분율이 비슷하기에 불씨는 계속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숱한 위기와 우여곡절 속에서도 살아남은 화성산업은 앞으로도 지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이다. 두 형제는 27년 전 납치 사건이 벌어졌을 때를 기억했으면 한다. 동생이 무사히 돌아왔을 때 형제가 서로 얼싸안고 감격에 겨워하지 않았던가. 해법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