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경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지난 2월 즉위 70주년을 맞았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재위 70년을 넘긴 왕은 루이 14세 프랑스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 요한 2세 리히텐슈타인 대공 등 단 3명뿐이었다. 영국에서는 올해 6월에 여왕의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을 기념하는 공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1952년 25세의 나이로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왕위에 오른 그는 영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등 15개 입헌군주국(Commonwealth realms)의 국가원수이자, 과거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국이 된 54개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인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특히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이들 국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여왕의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외부적으로는 20세기 중반 이후 급속한 정치·사회적 변화와 내부적으로는 후손들의 여러 가지 사회적 물의 등으로 인해 왕실의 위엄과 존재의 정당성이 위태로워진 때도 분명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왕은 지금도 흔들림 없이 영국 및 영연방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여기에는 왕실의 면세 특권을 스스로 철폐하고 소득세를 납부하는 등 탈권위적 모습으로 왕실의 위상을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노력도 분명 일조했을 것이다.
물론 군주제 폐지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리퍼블릭'과 같은 단체는 "여왕이 승하하고 나면 영국 왕실은 껍데기만 남는다"면서 공화국과 같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국가원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의 본고장임에도 영국에서는 여전히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주제를 유지하자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2022년 1월 영국 더타임스(The Times)의 조사에서 '여왕이 마지막 군주가 되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가 '아니다'라고 답변한 결과에서 보더라도 이 같은 여론의 기류가 잘 나타난다. 여전히 연령대가 높은 세대에서는 여왕을 통해 과거 화려했던 대영제국의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대영제국의 위상이 저물고 국제사회에서 힘의 축이 미국으로 이동한 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어가고 있지만, 여왕은 영국이 아직까지도 세계 무대에서 문화 및 외교적 영향력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이다. 최근 들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해외여행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영국 런던에 있는 버킹엄궁은 여전히 해외 관광객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여왕을 위시한 왕실의 존재 효과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웃돈다. 일례로 2015년 영국의 브랜드 평가 컨설팅 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는 영국 왕실을 기업으로 간주한다면 그 가치가 무려 567억 파운드(당시 환율을 적용하면 원화로 약 100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영국 왕실의 관광산업에 대한 막대한 기여, 왕실 인증제(Queen Royal Warrant)로 인한 가격 프리미엄 효과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사실은 경제적으로도 영국 왕실이 기여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21세기에, 그것도 의회민주주의의 산실인 영국에서 군주제가 적절한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재론의 여지 없이 그 존재 이유가 명확하다.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찰스 왕세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 그의 재혼한 부인 카밀라가 '왕비' 칭호를 받기를 희망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왕관을 내려놓기 전 후계의 안정과 더불어 왕실 가족들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칫 흔들릴 수 있는 왕실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나이에도 마지막까지 왕실과 국가를 위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70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게 한 여왕의 진정한 리더십이 아닐까 한다. 여왕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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