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애국가 2절의 가사에 나오는 소나무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고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우리민족의 강인한 의지와 씩씩한 기상을 상징한다.
소나무의 이름은 우리말 '솔'과 관계 깊다. 지금도 솔방울, 솔잎, 솔가지, 솔바람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소나무를 솔이라 부른다. 솔은 으뜸을 의미하는 말 '수리' 또는 '술'이 변한 것으로 나무 중에서 최고라는 뜻이 담겨 있다.
소나무는 한민족의 생애에 동반자였다. 옛날 조상들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생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치고 솔가리나 마른 솔가지를 땔감으로 밥을 지어먹었다. 소나무로 만든 가구나 도구를 이용하며 살다가 저세상으로 돌아갈 땐 소나무 관에 육신을 눕혀서 땅에 묻혔고, 무덤가에는 도래솔을 심었다. 소나무는 한국인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일생을 통해 생활과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옛날부터 소나무의 식재와 관리는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취급됐다. 궁궐과 관청 등 각종 건축물의 원자재와 해상운송 선박이나 전함을 건조하는 재료로 쓰였다. 선조들의 생활과 밀접한 소나무는 어디서 왔을까.

◆솔 씨의 본고장 안동 제비원
성주굿을 벌일 때 부르는 「성주풀이」를 음미해보면 소나무의 탄생 설화를 알 수 있다.
성주야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데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이로다
제비원 솔 씨받아
소평(小坪) 대평(大坪)에 던졌더니
그 솔 씨 점점 자라 소부동이 되었구나
소부동이 점점 자라
대부동(大夫棟)이 되었구나
대부동이 점점 자라
청장목 되고 황장목(黃腸木) 되고
도리 기둥이 되었구나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활연으로 서리서리 내리소서
성주풀이는 옛날 이사를 하거나 새로 집을 지어 집들이 할 때 혹은 연초에 가정의 재수굿을 할 때 부르는 무가(巫歌)다. 농경시대에는 농부 집안을 돌봐주는 성주를 위해 곡식을 넣은 성주단지를 집 정갈한 곳에 모셔두었다. 성주풀이에서 부르는 사설의 전국적인 공통점은 집안을 돌봐주는 성주신의 근본과 솔씨의 기원이 안동 땅 제비원에 있다고 여긴다.
이는 봉화, 울진, 영덕, 청송 등에 질 좋은 목재가 흔했고 집을 잘 짓는 훌륭한 목수들이 곳곳에 있었으며 따라서 안동 주변 고장에는 목조 건축물이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안동시 이천동 태화산 기슭에 있는 보물인 고려시대 마애석불, 일명 제비원석불 앞에 '솔씨공원'이 잘 조성돼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 소나무의 한반도 정착을 과학적으로 따지면 최소 6천여 년 전에 자라기 시작했고 3천 년 전부터 군락을 이뤄 무더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먼 옛날 백악기의 소나무 화석이 발견되는 걸 보면 적어도 6천500만 년 전부터 길게는 1억3천5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소나무가 먼저 자리 잡았고 이후에 정착한 한민족과 동반하면서 친숙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을 지을 때 소나무만 사용했는데 이는 소나무 목재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앉는 어좌 뒤의 「일월오봉도」에는 해와 달, 물, 다섯 봉우리가 있고 좌우에 소나무를 그려놓아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 특히 불로장생의 상징으로 여기는 십장생을 보면 해, 달, 산, 물, 돌, 불로초, 거북, 학, 사슴과 더불어 나무 중에서는 유일하게 소나무가 들어있다. 백목지장(百木之長), 만수지왕(萬樹之王)으로 소나무를 꼽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의 「화목구품」과 유박이 지은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에도 하나같이 소나무를 1품이나 1등으로 분류했고, 『화암수록』의 「화목28우」에는 솔을 오래될수록 운치가 더해진다는 의미의 노우(老友)로 표현하고 있어 소나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드러냈다.

◆소나무 종류
황장목, 금강송, 춘양목, 적송, 황금소나무, 참솔, 육송, 곰솔, 반송, 처진소나무……. 보통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소나무의 다른 이름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소나무 종(種)은 크게 참솔(육송), 곰솔(해송)로 구분 짓는데 변종으로는 반송(盤松), 처진소나무, 황금소나무 등을 들 수 있다.
참솔은 주로 내륙지역에 분포하며 목재로 아주 우수하다. 줄기에 붉은 빛이 감돌고 고갱이(심재)가 창자처럼 누런색을 띠는 황장목(黃腸木)을 으뜸으로 치며, 이를 임금의 관재로 사용했다. 춘양목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역에서 실어 온 황장목을 말하는데, 곧게 뻗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를 켰을 때 결이 곱고 부드러워 목재로는 최상으로 쳤다. 금강송은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나오는 황장목의 학명이다. 금강산에서 경북 울진, 영덕에 걸친 산악지대에서 주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의 한 품종을 학문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곰솔은 동해안지역에 많이 자라는 줄기가 흑갈색인 해송을 말하는데 염분이 섞인 갯바람에도 거뜬하게 견디는 강인한 생명력이 특징이다.
황금소나무는 솔잎이 누른색을 띠며, 반송은 나무 형태가 둥근 소반이나 쟁반처럼 생겼고, 처진소나무는 이름 그대로 가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어 일명 유송(柳松)이라고도 한다. 변종 소나무는 조경수로 인기를 얻고 있다.
◆적송 대신 소나무로 부르자
송목(松木), 황장목(黃腸木), 송전(松田) 등의 용어는 옛 문헌에서 찾을 수 있지만 금강송이나 강송, 적송이라는 말을 찾기 어렵다. 적송이라는 말이 원래 우리나라에 없었다는 말인데 그럼 이런 용어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국내 자생하는 소나무 가운데 붉은 기운이 도는 황장목을 가리켜 요즘 '적송'으로 부르는데 여기에는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일본에서 소나무를 적송(赤松あかまつ아카마쓰)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1910년 봄 이완용 내각이 공시한 「화한한명대조표」(和韓漢名對照表)에서도 소나무라는 이름 대신 적송으로 쓰게 했다. 우리 이름을 놔두고 적송으로 부르는 게 영 개운치 않다.
특히 적송을 영어로 번역하면 'Japanes Red Pine'인데 우리 식물 영어 이름에 엉뚱한 향명(鄕名)인 'Japanes'가 들어간 경우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나무 하나뿐이겠는가. 다행스럽게도 2015년 광복 70주년기념사업으로 학계에서 우리나라 식물의 영어 이름을 조사해 향명에 들어간 'Japanes'를 'Korean' 로 대체하는 이른바 '식물 주권 바로 잡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금강송'이라는 용어도 일본인 산림학자 우에키 호미키(植木秀幹) 교수의 1928년 논문 「조선산 소나무의 수상 및 개량에 관한 조림학적 고찰」에서 처음 나왔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개마고원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는 소나무를 조사해 '동북형' '중남부 고지형' '중남부 평지형' '위봉형(威鳳型)' '안강형'(安康型) '금강형'(金剛型) 등 여섯 곳의 지역 이름으로 나눠 구분했다.
이들 소나무 중에서 '안강형소나무'는 경주시 안강읍의 지명에서 따왔는데 나무 모양새가 볼품없고 키도 작다. 반면 '금강형소나무'는 강원도와 경북 북부의 소나무를 지칭하는데 줄기가 곧고 가지가 상부에만 좁은 폭으로 자라는 수형이다.
◆안강 소나무 빼어난 곡선미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흥덕왕릉의 소나무는 줄기가 굽거나 휘어지고 혹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는 안강형소나무의 전형이다. 이곳의 소나무가 굽은 것은 여름철 강우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나무가 자라는 데 토양이 다른 지역보다 열악하기 때문이라는 설(說)이 있다.
또 다른 분석은 신라시대 경주에 수많은 궁궐과 사찰을 짓느라 잘 생긴 소나무만 벌목한 탓에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소나무만 남게 됐다는 얘기다. 못난 소나무에서 솔 씨가 떨어져 간혹 쓸 만한 나무가 자라면 벌목되고 못생긴 것만 살아남아 대물림하는 일이 1천년 가까이 반복되면서 목재 가치가 떨어지는 형질이 고착됐다는 주장이다.
경주 배리 삼릉이나 낭산 선덕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도 흥덕왕릉 도래솔처럼 제멋대로 자라 줄기가 비뚤배뚤 뒤틀려 있다. 꽈배기 모양으로 꼬였거나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듯이 꾸부정한 소나무가 왕릉을 지키는 모습은 희한함을 뛰어넘어 독특한 곡선미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안강형소나무가 목재로의 가치는 떨어질지언정 사진작가들에게는 작품 촬영 성지로 통한다. 봄이나 가을에 안개 자욱한 새벽 무렵 용틀임하는 소나무의 몽환적 모습을 앵글에 담기 위해 작가들의 발걸음이 잦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옛말을 실감한다.
흥덕왕릉의 겨울 숲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맑은 소리를 멍 때리며 듣는 일은 솔숲을 찾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전이다. 선조들은 솔바람 소리를 송뢰(松籟), 송운(松韻) 혹은 송도(松濤)로 표현해 인간 정신을 정화시키는 음률로 여겼다.
퇴계 이황 선생이 쓴 「설야송뢰」(雪夜松籟) 시를 보면 눈이 쌓인 솔숲 사이를 스쳐가는 솔바람 소리를 악기 소리처럼 즐겼다.
地白風生夜色寒(지백풍생야색한)
눈 쌓인 땅에 바람이 일어 밤기운 차가운데
空山竽籟萬松間(공산우뢰만송간)
빈 골짜기 솔숲 사이로 가락이 들려오네
主人定是茅山隱(주인정시모산은)
주인은 분명 모산(띠풀로 덮인 산)의 은사(숨어 사는 사람)로
臥聽欣然獨掩關(와청흔연독엄관)
문 닫고 홀로 누워 즐겁게 들으리라 <『퇴계집』(退溪集)>
겨울 소나무에 이는 바람소리는 악보에도 없는 자연의 연주다. 청아한 곡조에 귀 기울이며 세상 시름 씻어내는 선현들의 혜안을 본받고 싶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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