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슈트루치온이 왕진을 가는데 마침 자기 당나귀가 임신했다. 할 수 없이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빌려 타고 함께 길을 떠난다. 날씨가 더워 의사는 당나귀에서 내려 당나귀의 그림자에 앉아 잠깐 쉰다. 이때 당나귀 주인은 빌려준 것은 당나귀이지, 그림자는 아니라고 하며 그림자를 사용한 돈을 더 내라고 한다.
이렇게 벌어진 싸움이 당사자 간에 잘 마무리될 듯했지만, 치과의사의 변호사는 의사의 돈이 탐나서, 당나귀 주인의 변호사는 당나귀가 탐나 싸움에 개입해 판을 키운다. 급기야 당나귀 주인 편인 당나귀 당과 의사 편인 그림자 당으로 갈라져 더 큰 싸움으로 번진다. 재판이 끝이 안 나자, 증인은 당나귀라 판정하고 애꿎은 당나귀를 죽이고서야 재판이 끝난다. 이 우화는 뷔일란트의 '압데라 사람들 이야기' 4권 중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에 실려 있다.
그리스 압데라는 아테네로부터 북쪽으로 70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프로타고라스가 이곳 출신이다. 말을 잘 해 상대를 설득하는 논쟁술을 가르치고 다녔던 당시 지식인으로 불린 소피스트의 리더가 바로 그였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똑똑한 청년을 보면 "자네는 프로타고라스만큼이나 똑똑하네"라고 칭찬인 듯 아닌 듯한 말을 하곤 했다. 말만 잘 하면 빌린 돈도 갚지 않아도 된다. 아는 것이 많아 흑을 백이라고도 설득할 수 있는 기술자란 뜻으로 궤변가로 불렸다.
이제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각 후보 진영에서 쏟아내는 온갖 공약이 현란하다 못해 궤변스럽기까지 하다. 궤(詭)는 위태로운 말이다. 궤변은 거짓을 참으로 설득하는 위험한 변론이다. 그 궤변으로 압데라의 애꿎은 당나귀가 죽었다.
내 귀에는 후보자들의 토론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똑같아 보이는 공약을 들어야 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같아 보이는 공약들을 남발하는 것보다는 딱 한 가지만이라도 차이를 생산하는 창의적 발상이 더 필요하다. 왜 'K-정치'는 없는가.
압데라에는 원자론을 주장한 데모크리토스의 동상이 서 있다. 이곳 출신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가르친다. 영혼의 원자가 외부 사물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때 행복하다고.
말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없어 당나귀를 타고 다닌 가난한 선비는 당나귀를 타고 나라 걱정을 한다. 난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 교정에서 '당나귀 등에서 시를 생각하다'(驪背詩思)는 제목의 조형물을 본 적이 있다. 현판에는 "헛된 화려함을 사모하지 말고, 명리를 꾀하지 말며, 겸손하고 공손하게 처세하며, 외부 사물에 초연하라"는 글귀가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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