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안에 있으면 그 속도감을 좀처럼 느낄 수 없다. 그나마 비둘기호나 통일호가 있을 무렵에는 자주 정차하는 이유로 속도의 흐름을 진동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는 생각과 꼬리를 무는 번뇌들로 머리가 여간 복잡하지 않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예전보다 활동 범위가 좁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음이 더 분주한 이유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연례행사라고 이해하면 되려나,
사람들 간의 만남이 줄어든 이후로 많은 것들이 비대면으로 대체되고 있다. 의식(衣食)에 관련되는 물건 대부분이 집 앞까지 배달되고, 현장감이 생명이었던 강의마저 메타버스와 같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오늘은 과거와 사뭇 대치된다.
새로움에 대한 부정까지는 아니지만, 우리가 오늘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때로는 멈추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전 통일호를 타고 60km의 속도에서는 보이던 소박한 마을들은, KTX 200km로 달리면 눈에 미처 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좀처럼 머리 스타일이 변하지 않던 20년 된 정감 있는 이발소, 언제나 말없이 곱빼기를 주시던 대머리 주방장이 살고 있던 중국집은 보이질 않는다.
빠르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 삶에 있어 정지, pause 기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쁜 생활에 부대끼어 인생의 기차에서 잠시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내어 여행까지 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눈만 감아도 그리운 사람을 불러낼 수 있는 작은 마음의 공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멈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잠시라도 자아가 편하게 쉴 수 있는 멈춤의 공간이 있다. 그 시간을 찾을 때면 난 돌아가신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라는 이름만으로도 일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시간이 멈춘다. 그와의 행복했던 시간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 시골 부뚜막처럼 언제나 따스했던 손길, 밭고랑처럼 주름진 이마의 촉감,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던 사랑 가득한 눈길. 아직도 내 가슴에 오롯이 남아 숨을 쉰다.
세발자전거에 막걸리를 걸어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드릴 때 좋아하시던 모습, 초등학교 입학식 날 껌이 손에 붙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자 손을 닦아내 주시며 가만히 달래시던 모습, 대학교 합격 소식에 동네 떠나가도록 크게 웃으시며 기특해하시던 모습은 흑백 사진이 되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자리하였다.
그러나 당신이 하늘로 돌아가는 날, 손끝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면 소생했다는 이야기처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 따스한 눈빛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을 수 있었을까 했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차가워가는 손, 희미해져 가는 의식, 그렇게 그와 이별을 해야만 했고, 불과 얼마 되지 않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와의 이별, 그 진공의 시간, 공기마저 압축되어 버린 듯한 시간은, 많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나에게 때로는 돌아볼 기회를 만들어준다.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패턴의 반복성 위에 진정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깨어있게 해준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라는 고은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난다. 정상만을 향해 급하게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지만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때는 비로소 그 고운 꽃이 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느림의 여유를 가지게 되면 같은 길을 오가면서도 내 마음을 울리는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빨리 달린다고, 쉼 없이 무엇을 한다고 해서 바른 것은 아니다. 삶이라는 길지 않는 트랙 위에서 어딘가를 향해 빨리 가기보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채워가야 할지 생각하며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때로는 Why라는 질문은 삶을 더 윤택하게 한다. 왜 사느냐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왜 꼭 필요하냐는 질문을 가지기 위해서는 달리는 기차, 이름 없는 역에 내리는 용기는 필요하다. 그리고 역 벤치에 앉아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며 당신의 자아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 속에서 오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는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다.

최경규 행복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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