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인형놀이

입력 2021-12-29 11:16:34

김지영 극단 만신 대표
김지영 극단 만신 대표

극단 식구들과 매년 하는 연말 회의에서 배우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집중훈련 기간을 갖자는 의견이 나왔다. 배우들 각자는 저마다 존중받아야 할 개성과 약점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일률적인 훈련보다는 각자의 강점과 약점을 고려한 개별적 훈련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 팀의 구성원 공통에게 해당될 수 있을 훈련 또한 분명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공통 훈련이 가능할지 구상하던 중, 인형을 활용한 연기 훈련을 진행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형은 어린 시절 거의 모든 이에게 좋은 놀이친구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시절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인형이란 말을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를 비유할 때에만 가끔 사용하곤 한다. 고백하건데 나는 어릴 때는 물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혼자 인형놀이 하는 걸 좋아한다. 인형놀이가 주는 여러 종류의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인형놀이를 하는 동안에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형의 사실적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강아지 인형도 말이 될 수 있고 구불구불 이불로 만들어진 산 능선을 넘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린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공상이 조금 더 현실의 옷을 입고 눈앞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인형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 인형 하나를 가지고 해보이는 온갖 장난이면 어린 동생을 몇 시간이고 웃게 해줄 수 있었다.

한편 인형놀이는 나 자신과 세계를 투영시켜 진행하는 고발이 되고 투쟁이 되기도 한다. 어릴 적 나한테는 사람 모양의 아주 작고 보드라운 분홍색 인형이 있었는데, 그 인형의 하얀 얼굴에는 까만 눈 두 개가 박혀있을 뿐 입이 없었다.

하루는 문득 그 친구에게 입이 없다는 게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서툰 솜씨로 빨간색 실로 한 땀, 작은 입을 만들어 주고는 행복해 보이는 인형을 보고 나 역시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다. 인형의 변화없는 하나의 얼굴에서도 온갖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기억과 경험들이 인형에 투영되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형놀이 속 고발과 투쟁은 특히나 아이들이 둘 이상의 인형을 가지고 역할놀이를 할 때 잘 관찰할 수가 있다. 자기는 이러이러한 것을 바라는데 엄마나 선생님이 무섭게 혼을 내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스토리의 놀이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연극을 한다는 것도 일종의 인형놀이이다. 현실의 사람이 아닌 등장인물들을 가지고서 하는 나 자신과 세계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 놀이를 보아줄, 이 놀이를 통해 웃고 웃을 누군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앞으로도 더 잘 놀아보도록 계속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관객 여러분들도 우리의 인형놀이를 즐겁게 지켜봐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