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누가 누구를 평가하나

입력 2021-12-16 20:45:46

채정민 사회부 차장
채정민 사회부 차장

'사상 처음'이란 말이 유독 여러 번 붙는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즉 지난달 18일 치러진 이번 수능시험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러지면서 국어, 수학 영역이 '공통과목+선택과목' 체제로 전환한 게 이번이 처음이다. 수험생들은 어느 선택과목을 고르는 게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지를 두고 머리를 싸맸다.

또 있다. 수능시험에서 문제의 정답 효력이 정지된 건 1994년 수능시험 시행 이후 처음 있는 일. 수험생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을 상대로 낸 2022학년도 수능시험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가 추가로 낸 집행정지 신청을 일부 인용해서다. 9일 벌어진 상황이다.

논란이 된 부분은 과학탐구 영역 중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을 다룬 생명과학Ⅱ의 20번 문제. 일부 수험생이 지문의 조건에 따라 계산하면 동물 종 두 집단 중 한 집단의 개체 수는 음수(-)가 나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집단이 존재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동물을 '-1마리' '-2마리'와 같이 세지 않으니 문제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평가원 주장은 달랐다.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 해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이 유지된다는 게 평가원의 입장. 하지만 재판부는 수긍하지 않았다. 신청인들의 손해가 발생할 경우 금전 등으로 보상할 수 없는 대입 합격 여부 결정이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에 해당한다며 9일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사상 처음'은 이게 끝이 아니다. 재판부가 정한 효력 정지 기간은 본안 사건의 1심 판결 선고 때까지다. 애초 재판부가 예정한 선고 기일은 17일. 문제는 10일이 수능시험 성적 통지일이라는 점이었다. 수능시험 성적을 발표하기 전날 성적 발표가 미뤄진 것도 역시 전례가 없는 일. 10일 생명과학Ⅱ에 응시한 수험생 6천515명은 해당 과목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들어야 했다.

당연히 이런 문제로 대학입시 일정이 뒤로 밀린 것도 처음이다. 교육부는 정시모집 일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수시모집 일정을 늦췄다. 애초 16일까지 수시모집 합격자를 발표하기로 했으나 18일까지로 바꿨고, 합격자 등록과 미등록 충원 일정도 덩달아 연기됐다.

법원은 대입 일정을 고려해 15일로 선고 기일을 앞당겼다. 그러고는 평가원 처분을 취소하란 판결을 내렸다. 문제에 명시한 조건 일부 또는 생명과학 원리를 무시한 채 답을 고르라는 건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강태중 평가원장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혔다.

재판부의 얘기처럼 평가원의 논리는 틀렸다. 평가원의 안일한 인식 탓에 평가원뿐 아니라 수능시험의 신뢰도도 훼손됐다. 문제의 조건이 불완전해도 답을 내는 데 무리가 없다는 말로 책임을 피하려 한 건 잘못이다. 우리 교육을 두고 과정은 제쳐 두고 풀이 암기와 정답 찾기에만 골몰한다는 비판을 하곤 한다. 평가원이 꼭 그런 꼴이다.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자세도 틀렸다. 평가원장은 10일 브리핑에서 가처분 인용 여부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답 오류가 인정될 상황을 예단하고 있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정답 오류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도 깔끔하지 못했다. 재검증 과정에선 자문한 학회 3곳 중 2곳에 평가원 인사들이 다수 포진됐다는 게 알려져 공정성 시비가 일기도 했다. 이 정도면 수험생이 아니라 평가원을 재평가해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