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편자의 감각

입력 2021-11-03 11:12:37

이수민 소설가

이수민 소설가
이수민 소설가

학창 시절 미술 성적은 C였다. 두 시간 꼬박 몰입해서 손을 그려도 제출 직전 캔버스를 보면 새끼손가락이 실종되어 있고, 흙으로 정성스레 빚은 오리도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어려웠다. 미술 시간만 되면 주눅이 들었다.

교과서를 펼쳐 데생과 조각, 소조 기법을 잠시 익힌 게 배움의 전부였다고 회상한다. 나머지는 실전이었다. 연필로 선을 긋거나 흙을 다듬고 깎는 사이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무거운 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 오리는 평가의 대상이었을 뿐, 머리 무게를 떠받쳐 일으키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정물화 시간이었다. 병에 꽂힌 장미와 안개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라고 했다. 장미는 붓으로 슥슥 그렸는데, 안개꽃의 표현은 쉽지 않았다. 흰 꽃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낸단 말인가. 문득 필통에 담긴 수정액이 보였다. 같은 흰색이라도 결이 다른 재료로 점을 찍으면 꽃이 캔버스에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시도에 만족했다. 볼록 튀어나온 꽃의 질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종이 귀퉁이에는 어김없이 C가 찍혔다. 늘 그렇듯 이유는 쓰여 있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 작품의 낙관은 교사가 휘갈긴 C였다.

알파벳 C를 가만히 보면 편자가 떠오른다. 말발굽에 박아 넣는 쇠붙이가 옆으로 누운 듯하다. 노역마와 경주마에만 편자를 댄다고 들었다. 자연에서 노니는 말보다 많이 일하고 빨리 달려 굽이 일찍 닳는단다. 낙관처럼 찍힌 C에 편자의 쓰임이 묘하게 겹쳤다. 꽃을 그릴 때조차 편자를 댄 경주마처럼 경쟁적으로 질주해야 하는 걸까.

얼마 전부터 도예를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흙을 빚어 가마로 넣는다. 학창 시절의 악몽에 가로막혀 용기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편자의 감각은 아직 남아 흙 빚는 손을 괴롭힌다. 흙벽이 얇아 구멍이 뚫리면 어김없이 자조 섞인 푸념을 뱉고, 생각보다 좋은 손놀림에는 '뭘 잘못 먹었나'라고 머리를 갸우뚱한다.

내 손은 여전히 거칠고 성기다. 배우지 않아도 멋진 작품을 척척 빚어내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래도 얼마 전부터 흙을 빚어 굽는 작업에서 글쓰기와 비슷한 즐거움, 성취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답을 두지 않고 가르치는 강사의 방식도 만족스럽다. 두꺼우면 깎고 얇으면 덧댈 수 있는데, 마음대로 빚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강사는 반문한다. 흙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의 감수성, 순수한 창작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다.

처음 만든 접시는 가맛불을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갔다. 주로 굽 쪽이었다. 망가진 굽 밑에 편자를 박아넣는 대신 붓을 들고 푸릇한 경험의 흔적을 남겼다.

'No. 1. 찌그러져도 괜찮아.'

웃는 얼굴도 낙관처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