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 소설가
대학 시절 스웨덴에서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지냈다. 부엌을 공유하는 기숙사에서 1호부터 10호까지, 열 명이 함께 생활했다. 밥을 지으며 일상을 나눴다. 그저 재료를 썰고 다듬는 사이 오가는 양념처럼 툭툭 말을 뱉다가, 이야기가 깊어지면 차를 끓였다.
2호와 3호는 부엌에서 단연 튀었다. 2호는 양파 수프, 3호는 납작한 밀가루 빵만 밤낮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조리가 끝나면 후다닥 에피타이저 같은 음식을 해치우고 방으로 사라졌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바텐더였던 2호는 심리학자를 꿈꾸며 대학원 진학을 앞두었고, 록밴드 기타리스트였던 3호는 검사가 되고 싶어 했다. 투어까지 다니던 밴드를 접고 검사를 꿈꾸는 이유를 물었더니, 불의의 사고로 멤버를 잃었을 때 법정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반복하고 싶지 않단다. 얼굴에 서린 비장함이 거칠고 단단한 빵의 식감을 닮아 있었다.
늦깎이 학생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정부가 보조하는 생활비가 부족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학생이 많지만, 두 사람은 수프와 빵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대신 남는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고행하는 곰이 따로 없었다. 몇 년 뒤, 그들이 심리학자와 검사가 되어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톡홀름 대학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을 만났다. 공부에 나이는 상관없었다. 졸업 이후 구직에도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에서 나이는 주름의 깊이나 근육의 상실 같은 육체의 퇴화 정도만을 의미하는 듯했다.
귀국해 복학하고 나서도 두 사람을 종종 떠올렸다. 신입생 환영회에 가면 갓 고등학생 딱지를 뗐거나 재수학원에 다니다 온 학생들 뿐이었다. 한국에서 성장했다면 둘은 과연 심리학자와 검사가 될 수 있었을까. 나이 많은 지원자가 로스쿨 입시에서 불리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운전하다 보면 뒤에서 거칠게 몰아붙이는 운전자를 만나곤 한다. 차선 변경을 염두에 두거나 유턴을 하고 싶지만 좀처럼 여의치 않다. 비슷한 운전자 여럿이 꼬리를 물면 일방통행로에 갇힌 듯 앞으로만 나아가게 된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삶이 그런지 모르겠다. 나이에 덧입힌 편견과 제약이 바짝 추격해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추격당하는 운전자는 다른 운전자를 또 몰아붙인다. 어느 땐 모두가 서로의 차선 변경과 유턴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쫓기듯 앞만 보고 달린다.
이제 백 년 가까이 운전대를 잡아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삶은 일방통행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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