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책방 손님 열전

입력 2021-09-27 13:26:23

박주연
박주연 '여행자의 책' 공동대표

#1. 대구에서 나고 자란 A씨는 스무살이 돼 해군에 입대하기로 한다. 제주에 자대 배치돼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럭저럭 적응 중이다. 군대 생활을 견딜 유일한 취미는 단편소설 읽기다. 올해 들어서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런 소설이 혹시 또 없을까하며 휴가만 기다렸다. 집에 오갈 때는 대구공항을 이용하는데 인근에서 당장 책을 사고 싶어 서점부터 검색했다. 길 건너 책방을 찾아낸 군인 A씨는 장류진 소설집과 역대 젊은 작가상 시리즈를 선택했다.

#2. 아들과 함께 북카페를 차리는 것이 꿈이었던 B씨는 큰길에 나온 옷가게를 넘겨받아 운영 중이다. 조용한 동네를 걸어서 출퇴근하며 지난 겨울부터 뚝딱뚝딱 소리가 나는 상가를 유심히 봐왔는데, 남편이 좋아하는 책도 잔뜩 있길래 한번 들어가 보았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해놓고 서가를 살피던 B씨는 자기도 모르게 "아! 이 양반!" 탄식하며 박완서 에세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 하는 옷가게를 북카페로 바꿔보는 꿈을 꾸게 되었다.

#3.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 비에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내린 여고생 C양은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집으로 갔다. 우산 옆으로 마구 치는 빗방울에 한쪽 어깨를 다 젖으면서도 오래간만에 생생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옆 동네 낯선 골목으로 접어들어 서점을 발견하고는 잠시 밖에서 구경하다가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문학동아리 모임날 일찍 마친 틈을 타 그 서점을 향해 다시 헤맨다. 마침내 발견한 책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C양은 보르헤스 소설과 브레히트 작품집을 골랐다.

#4. 대학원을 다니며 아빠 작업실에 한 번씩 놀러 오는 D씨의 최근 관심사는 어느덧 노령의 나이에 접어든 반려견의 건강과 밀크티의 달콤쌉싸름한 맛이다. 반려견 운동을 시킬 겸 동네 산책에 나선 D씨는 카페 마당에 서서 밀크티를 주문했다. 가게 주인은 고개 숙여 반려견에게 인사한 뒤 몇 살이냐고 질문했다. D씨는 자신도 모르게 높임말까지 써가며 "열여섯 살이세요"라고 알려주었다. 밀크티를 받아든 D씨는 카페의 다른 쪽 문을 열고 나가며 "어머, 서점도 있었네"라고 중얼거렸다.

#5. 추석이라 시댁에 가야 했던 E씨는 문득 지친 자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 연휴 기간 중 단 1박2일 만이라도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E씨는 전부터 봐둔 서점의 밤샘 독서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시도한 덕분인지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이 새 감성을 불러일으켜서인지 뒤라스의 초기 소설을 고른 것도 의외의 일이었다. 책방 2층 단독공간에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E씨는 앞으로 명절의 첫날은 책과의 하룻밤으로 보내겠다고 털어놓았다.

요사이 다녀간 책방 손님들의 이야기다. 아직도 손님이 찾아오면 속으로 놀라기 때문에 계산을 하다 말고 "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라고 조심스레 묻곤 한다. 그러면 그들은 책을 가져가면서 그 자리에 사연을 내려놓는다. 책방지기는 글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읽는다. 자기 자신도 한 권의 책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손님들은 그렇게 책방 문을 열고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