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은 내게 치유의 과정이고 또한 진실해야 합니다. 특히 나의 예술작업은 반복적 노동을 통한 육체적인 고통을 동반하고 있어 삶과 예술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제 작품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치유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09년부터 한방에서 쓰는 침(針)을 갖고 입체와 평면 작업을 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 손파(54)는 스스로를 '미술가'로 불러주길 원한다. 설치, 평면, 입체, 조각 등 다방면의 작품을 표현하고 있는 그에게 장르를 한정한 수식어는 되레 어색하기 때문이다.
아카시아 나무가 숲을 이룬 신동재 고갯길 8부 능선에서 길을 틀어 들어선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에 자리한 폐교. 손파는 이곳에서 15년째 오롯이 작품 활동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곳서 너무 오래 있어서 올해 안에 경북 청도군 이서면에 새 작업실을 마련해 이주할 겁니다."
웬만한 철공소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그의 작업실은 3칸으로 나눠져 작업별 도구들과 작품들이 널려있었고 특히 눈에 띄는 건 수많은 종이컵에 빼곡히 들어있는 침들이 선뜻 자리에 앉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경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85학번)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계명대 교육대학원서 미술교육을 전공한 손파는 고향 문경에서 초·중 시절 서예가 호림 채용복이 자신의 집에서 하숙을 한 인연으로 서예를 배우며 붓과 친숙해졌고 대구 능인고로 진학해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다.
"어릴 적 호림 선생이 먹을 치는 한지의 흰 화면이 나에게는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다가왔었고 그 강렬한 인상이 화가로서 길을 걷게 한 동력이 됐습니다."
대학 땐 구상과 추상에 대해 탄탄한 실력을 쌓아가며 내면세계에 관심을 가졌으나 졸업 후 한 10년간 생활 전선에서 일하다 보니 본격적인 전업 작가가 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런 이유로 손파는 2006년 당시 대구의 한기숙 갤러리에서 연 설치전이 첫 개인전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타이어 튜브를 주재료로 한 의인화 작품을 선보이면서 작가로서 실질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그에 따르면 타이어튜브는 사람의 피부를 상징한 것으로 이를 찢어 도살장으로 끌러가는 동물 형상을 묘사, 이를 통해 '처절한 삶의 모습을 배설'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손파는 이 설치물의 울퉁불퉁한 질감과 덩어리감에 매료돼 평면에서 조각과 입체로의 관심이 옮겨가면서 사용하는 물성 또한 나무, 철, 흙, 연탄 등 이용해 작가 특유의 조형언어를 창조해가기에 이르렀다.
"작업을 하면서 늘 사회적 배경이 약하면 명성이 알려지기 힘이 드니 차라리 외부평가에 상관 않고 나만의 예술세계에 탐닉하고 싶었고, 이후 전시에 신경 쓰지 않고 재료에 대한 연구와 작업에 몰입해가는 과정들이 무척 재미있었고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전업 작가로 화업 15년 동안 작가의 개인전이 단 5회만 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파는 이렇듯 예술에 사용되는 물성 탐구에 침잠해 있던 어느 때, 갑자기 '나의 존재는 재료를 연구하는 사람밖에 안되느냐'는 생각이 미치자 '이래선 안 되겠다'싶어 연구의 방향을 '나의 존재에 대한 탐구'로 전환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때부터 앞서 말한 한지의 하얀 바탕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경험이 의식 속에 되살아나면서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 지, 인간은 왜 두려워하게 되는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 두려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와닿음은 바로 칼이나 침과 같은 뾰족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손파의 작업에 칼, 못, 소뿔 같은 날카로운 물성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2009년부터는 가장 뾰족한 물성인 침이 그의 작품에 등장, 이후 그의 화풍에서 부동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제 작업이 지속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은 '결핍'입니다. 현재까지 가정경제를 맡아준 아내가 고맙고…. 저의 작가로서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재료가 표현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재료에 대해 겁이 없죠. 단돈 1, 2만원으로 고물상에 가면 생각보다 많은 재료를 구해 올 수 있었습니다."
손파의 침 작품이 첫 선을 보인 건 2016년 싱가포르 아트페어에서였다. 여기서 그의 침 작품은 많은 호응을 얻었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 작가로 참여하면서 유명세를 얻는다. 사실 그가 침을 재료로 한 작품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릴 적 작은 침이 어떻게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했고, 침 작품 초창기엔 아는 한의원을 찾아가 쓰고 남은 침을 모아 작품으로 구성하게 됐다.
직접 만든 합판 위에서 표현되는 그의 침 작품은 작품마다 기법이 모두 다른 게 특색이다. 블록 모양의 작은 조각에 침을 수십개의 침을 담아 그 블록 조각들로 조형언어를 빚어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침을 구부려 일일이 작은 퍼즐 단위로 만들고 이 퍼즐로 보다 큰 형태를 화면에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두려움의 대상과 친숙하게 되면 나중에는 그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고요."
손파의 예술 작업이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답이다. 그의 뮤지엄 시리즈 중 하나인 중세 투구에는 투구의 안쪽으로 약 30만개의 침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침 작품 중 최대 300여 만개의 침을 사용한 입체작품도 있다. 보통 손파의 침 작품에는 입체의 경우 70여 만개, 평면의 경우 30만~40여 만개의 침이 사용된다. 공장에서 개당 20원이나 30원에 구입하는 침의 개수가 이러하니 작품의 무게는 당연히 무거울 뿐 아니라 설치도 어렵고 재료비도 정말 만만히 않고 작품가격 또한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9월 초 타이완 타이중(台中)시 현대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해외 개인전은 엄청난 호응과 함께 작품들이 팔려나갔다.
작가의 본명은 손창환이다. 손파는 2005년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길을 나설 때 사진가 김아타 씨가 '스스로를 깨뜨려라'는 뜻으로 '파'(破)로 지어준 예명이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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