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부인사와 초조대장경

입력 2020-06-03 16:30:00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대구 부인사는 팔공산 남쪽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서 '符仁寺' 또는 '夫人寺'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부인사의 창건 시기는 성덕왕 재위 기간으로 추정된다. 성덕왕이 712년에 김유신의 업적을 기리며 지소(김춘추의 셋째 딸이자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해마다 벼 1천 석을 하사하였는데, 나중에 지소부인이 비구니가 되자, 성덕왕이 지소부인을 위해 팔공산 자락에 부인사를 건립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부인사'라고 적힌 문헌 자료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옥룡사동진대사보운탑비"의 내용을 보면, 도선국사의 제자인 동진대사 경보(慶甫, 868~947)가 부인사에 출가하여 불경을 깨우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부인사는 초조대장경을 봉안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대장경'(大藏經)은 부처님이 제자와 중생들을 교화시켰던 설법 등을 집대성한 불교 경전이다. 초조대장경은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의 전신으로, 팔만대장경(제작 기간 1236~1251)이 호국 불교의 마음을 담아 몽골군이 퇴각하기를 간절히 기원했던 것처럼,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써 극복하고자 1011년경에 현화사에서 조판하기 시작하여 1087년에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잠시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을 살펴보면, 993년에 소손녕의 거란군 80만 명이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서희가 서경 이북의 땅을 할양하자는 주장에 반발하여 소손녕과 외교 담판으로 거란에 조공하는 것을 조건으로 강동 6주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이후 강조의 정변으로 대량원군(大良元君)이 8대 현종으로 즉위하자, 1010년에 거란 성종은 이를 구실로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진군하여 개경을 함락하였다. 이에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로 거란에게 항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나주로 피신하였다. 현종이 몽진하는 과정에서 하공진(河拱辰)을 강화협상 대표로 파견하자, 하공진은 현종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018년에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이 고려를 재차 침입하자, 강감찬과 강민첨은 흥화진 동쪽에서 가둔 물을 터뜨려 매복기습으로 적을 궤멸시켰고, 끝내 성과 없이 철군하는 소배압의 거란군마저 귀주대첩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후 1216년에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군과 금군에 밀려 고려 영토를 침범하자, 고려 정부는 고려군을 파병하여 거란군을 패퇴시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몽골군이 거란족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고려 영내로 넘어와 고려군과 함께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족을 진압하였다(1219). 곧바로 몽골의 합진·찰라와 고려의 조충·김취려 사이에서 형제 맹약이 체결되었다. 그 기간 동안 거란족은 고려 중부 지역까지 휩쓸면서 묘향산의 보현사를 불지르고 순릉(혜종왕릉)을 도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거란족이 개경까지 위협하던 상황에서 고려 정부는 현화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을 부인사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부인사가 속해 있는 팔공산은 '중악'(中嶽) 또는 '부악'(父嶽)으로 일컬어진 영험한 지역으로 인식되었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용이한 요새였다.

그러나 1232년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하자, 살례탑의 몽골군이 고려를 거듭 쳐들어와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촉구하였다. 살례탑의 몽골군이 북계에 머무는 동안, 그 일부는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노략질을 서슴지 않았다. "고려사"(고종세가)에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 몽병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라는 기사와 "동국이상국집"(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부인사 소장의 대장경 판목도 또한 불태워져 남아 나지 못했던 것이다'라는 기록을 종합하면,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이 살례탑의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현재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된 부인사 발굴조사를 토대로, 앞으로 부인사의 원형을 회복하고 현존하는 유물을 보존함과 동시에 '대장경'이라는 우수한 문화재를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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