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시간을 넘겨서도 잠이 안 올 때면 가만히 눈 감고 양(羊)을 세라는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가 간혹 있다. 어려서는 '하나, 둘, 셋' 하며 그냥 숫자를 셌던 거 같은데, 언제부턴가 양을 세는 것이 불면증의 특약 처방처럼 자리 잡은 걸 보면 우리 속에 서양 문화의 그림자가 짙긴 짙은 모양이다. 어찌 되었거나 처방의 원산지야 어디든 일단 숙면이 목적이니까 잠이 안 올 때면 양을 한 마리씩 불러내며 카운팅한다. 초원에서 뛰노는 놈들을 세다가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면 장면을 옮겨 목동의 통솔로 도로를 떼 지어 가는 놈들을 센다. 양이란 것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보니, 배경은 대부분 TV에서 본 외국 풍경들이다. 그러다 이마저도 집중이 안 되면 아예 까만 어둠이나 하얀 바탕을 배경으로 한 마리 두 마리 불러낸다.
그러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양의 진짜 본래 모습은 어떤 배경에 있을 때일까? 아니, 배경 없는 양의 모습이라는 게 가능할까? 초원이든 도로든, 까만 어둠이든 하얀 밝음 속이든 양은 언제나 특정한 배경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사진을 찍을 때 배경을 제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배경을 없애고자 스튜디오에서 흰 스크린을 뒤로하고 찍을 때조차도 우리는 '흰 스크린'이라는 배경 속에 있다. 이렇듯 배경 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 그런데 이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식의 허를 찌르는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어떤 것을 떠올릴 때 결코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필수적인 것으로도 생각되지 않는 그 '배경'이 실제로는 그 사물에 대한 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이룬다는 점이다.
유명한 〈모나리자〉 그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늘 특정 형태의 액자에 둘러싸여 어딘가에 걸려 있다. 이럴 때 그것이 걸려 있는 벽체의 질감과 색감, 그리고 액자의 형태와 무늬는 이 그림에 대한 인상을 일정 부분 결정짓는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를 직접 본 사람이 그림에 대해 갖게 되는 인상 속에는 그것이 걸려 있는 벽체의 옅은 갈색 톤과 짙은 고동색 액자가 주는 이미지가 처음부터 들어가 있다. 이런 배경적인 요소들은 그냥 주변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모나리자〉에 대한 인상의 불가결한 성분 가운데 하나로 녹아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우리가 가지게 되는 인상도 마찬가지이다. 그와 주로 만나는 장소, 그가 즐겨 입는 의상, 그가 타고 다니는 차 등의 이미지에 그것은 '언제나 이미' 물들어 있다. 이것들을 뺀 '그 사람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음 직한 이 이치를 불교에서는 인타라망(因陀羅網)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예컨대, 커다란 방 천장에 형형색색의 색깔을 지닌 천 개의 전구가 켜져 있다고 하자. 빛의 간섭 현상에 미루어 그 가운데 어느 하나의 전구가 발하는 빛은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전구들의 빛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같은 이치로 다시 그 옆에 있는 전구로 그리고 다시 또 그 옆에 있는 전구로 차례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비록 멀어질수록 강도는 약해지겠지만 결국 그 하나의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나머지 999개의 전구가 발하는 빛의 색깔에 모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역방향의 간섭 현상도 당연히 발생한다. 그 하나의 전구 속에는 나머지 999개의 전구에서 퍼져 나오는 갖가지 서로 다른 빛들이 들어와 있게 된다. 바로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의 깨우침이다.
나라 안팎에서 혐오와 배제에 기대어 작금의 어려움의 본질을 분칠하려는 유혹이 거세지는 듯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고 그 속에서 전개되는 우리의 삶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전부터 이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이다. 삶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 혐오와 배제를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들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결과적으로 혐오받고 배제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이기도 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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