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570년 전의 전염병 비상대책회의

입력 2020-04-13 18:00:00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1451년(문종 1) 9월 문종은 친히 악병(惡病)을 치료하는 논의를 작성하여, 도승지 이계전에게 내렸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특별담화문을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한 것이다.

1448년 10월부터 황해도에서 유행한 악병이 경기도 교하와 원평 등지까지 전파되어 그 세력이 자못 커지고 있으며, 경기와 가까운 서울까지 전염된다면 큰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문종은 전염병이 확산되면 천도(遷都) 논의가 있을 수도 있다면서, 이 병을 치료하는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문종은 "혹자는 '벽사(辟邪: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하는 약을 모아서 큰 향(香)을 만들어 환자가 있는 곳에 주야로 사르면 그 기운이 소멸하여 흩어진다'하고, 혹자는 '약사여래에 의존하는 수륙재(水陸齋: 불교에서 바다와 육지의 영혼에게 올리는 재)를 행하면 그 기운이 자연 소멸한다고 한다'"면서, 당시의 전염병 퇴치법을 소개하였다.

이어 문종은 "모든 병의 전염이 처음에는 기근과 추위, 더위에 대한 조절을 잘 하지 못하여 여러 병을 이룬다. 그 병이 초기에는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불길을 소멸시킬 수 있지만, 병세가 중함에 미쳐서는 불길이 치열하고 그 기세가 크게 번지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을 죽이고도 간악한 기운이 점점 커지고, 다시 흩어지지 않고는 타인에게 접촉만 하면 곧 전염이 확대되어 마치 불이 땔나무를 얻음과 같이 한없이 연소하게 된다. 어찌 꼭 여귀(厲鬼: 전염병 귀신)가 있어 인명을 탐하겠는가?"라고도 했다. 이는 전염병의 전파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종은 대책까지 제시하였다. 그는 "지금 병에 걸린 사람을 빠짐없이 찾아내 인적이 끊긴 섬에 몰아 놓고 의복, 양곡, 약품 등을 넉넉히 주어 타인에게 더 번지지 않도록 할 것인데, 비유컨대 불타는 벌판의 불도 연소되는 풀을 제거하면 그 피해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고 하며, 전염병 전파를 막기 위해서는 격리 시설의 활용이 우선적이라고 판단하였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어 여귀에게 제사하는 것도 유익함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의료 수준이 열악한 현실에서 정신적인 도피처가 필요한 점을 인정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문종은 전염병 방지 대책에 대한 의견을 밝힌 후에, 신하들의 견해도 수합하였다. 이계전은 벽사하는 약을 주야로 사르면 그 기운을 소멸하는 이치는 있지만 약을 다 공급하기 어렵다는 점, 병을 위해 수륙재를 하는 것은 허황한 일이라는 것, 여제(厲祭)는 이미 이루어진 규정대로 행할 것 등의 의견을 제시했다.

좌찬성 김종서는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수륙재도 가능하다면서, 자신이 함길도 절제사로 있을 때 전몰 군사 유골 100여 석(石)을 주워 수륙재를 행한 사례를 소개했다.

우의정 황보인은 수륙재는 할 수 없고 여제만 온당하며, "전염된 자는 특히 굶주리고 부실한 사람들입니다"라며 사회적 약자들이 전염병에 취약한 점을 지적하였다. 이어 환자를 옮겨 놓은 일은 부모와 처자가 서로 격리되는 고통이 있어서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제기했다. 우참찬 허후는 "일부에서 양반들은 아직 전염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황주 판관의 사례에서 보듯 양반들도 전염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의견을 냈다.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문종은 "전염된 자는 특히 굶주리고 부실한 사람들이란 말은 옳지 않다. 이는 통하지 않는 의논이다. 향을 사르는 것이 약을 먹는 것만 같지 못하며, 황해도의 역질에 수륙재를 지낸 후 역병의 기운이 약간 흩어졌다는 말은 비록 허망하지만 인심이 향하는 바이니 수륙재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여제는 행해도 좋다"는 의견을 다시 제시하였다.

이에 황보인 등은 향을 사르는 것은 사세로 보아 어렵다는 것, 효과를 본 벽사약(辟邪藥: 전염병 치료제)을 환자들에게 보급하겠다는 것, 수륙재는 금할 필요 없이 스스로 지내도록 할 것 등을 최종 보고했고, 왕은 이를 수용하였다.

위에 소개한 내용은 1451년 9월 5일에 있었던 전염병 비상대책회의를 요약한 것으로, '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570년 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현재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 등에서 실제 진행되는 코로나19 대책회의와도 매우 닮아 있다. 그만큼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공포와 극복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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