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심사정(1707~1769) '어약영일'

입력 2020-01-05 06:30:00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129×57.6㎝, 간송미술관 소장
종이에 담채, 129×57.6㎝, 간송미술관 소장

예전에는 그림의 쓸모가 인생사의 굽이굽이에 무척 많았다. 탄생, 생일, 회갑 등 한 사람이 태어나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그림으로 축하하기도 했고, 병에 걸렸다 낫거나 통과의례의 기쁜 일에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을 때는 합격을 그림으로 기원해 주었으며 합격 후의 취직, 승진, 전근, 퇴직을 축화(祝畵)로 기념해 주기도 했다. 그런 사연을 그림 속에 직접 써넣기도, 시구(詩句)로 은근히 나타내기도 했다. 지금은 화환이나 화분, 기념사진, 현금, 축하케이크, 합격 엿 등이 대신해 그림의 그런 용도는 대부분 사라졌다. 창작물로서의 존재감에 충실할 뿐 화가나 의뢰자, 소장자의 인생사와 관련되는 어떤 스토리가 스며있는 그림은 드물다.

그래서 옛 그림 중에는 그릴 내용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특정한 도상(圖像)의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은 여차여차한 이야기로군, 하면서 주고받는 당사자는 물론 주변에서 다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합격 엿이 철썩 붙으라는 뜻인 것처럼. 물론 일정한 양식이 있더라도 그 주제가 어떤 방식으로 소화되고, 어떤 구도로 설정되어 어떤 작품으로 창작될 것인가 하는 것은 오로지 화가의 손에 달려 있다.

'어약영일(魚躍迎日)'은 거센 물결 속에서 잉어 한 마리가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장면을 그렸다. 중국 황하의 용문을 뛰어 넘은 잉어는 용으로 변한다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의 등용문(登龍門) 고사로 널리 알려진 과거급제 기원 그림이다. 화면 위쪽에 "정해 춘중(丁亥春仲) 위 삼현 희초(爲三玄戱艸) 현재(玄齋)"라고 써 넣어 심사정이 회갑 된 해인 1767년 2월 '삼현'에게 그려준 것을 알 수 있다. 삼현은 과거 준비생이었던가 보다. 과거 급제는 조선의 양반에게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 외에 마땅한 직업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제가 유달리 눈에 잘 뜨이는 것을 보면 심사정은 삼현의 급제를 각별히 축원했던 것 같다.

등용문의 빤한 도상을 해돋이의 장관과 결합해 회화미 넘치는 감상화로 완성시킨 것은 역시 심사정의 실력이다. 화면 가득한 물결의 파노라마는 옅은 푸른색 선염과 어울려 강약과 농담의 스스럼없는 필치로 수평선까지 수렴되고, 자칫 촌스럽게 되기 쉬운 붉은 해는 거의 다 떠오른 우아한 둥근 모습으로 은은한 서기(瑞氣)가 감돈다. 도약에 성공한 잉어는 용이 되어 승천한다. 새해의 다짐을 담을 그림으로도 더없이 훌륭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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