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계림에 뜬 달

입력 2019-01-02 13:02:48 수정 2019-01-02 18:45:34

각정 스님 청련암 암주

각정 스님 청련암 암주
각정 스님 청련암 암주

새해가 되었다. 겨울바람이 한랭전선을 몰고 와서 물기 있는 것들을 꽁꽁 얼게 하였다.

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며 경주에 다녀왔다.

삼국유사는 온통 신라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여행길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일은 옳은 일이다.

원효, 혜초, 일연 스님도 길 위에서 만났다. 길 위에서 가르치며, 배우고, 꿈을 만들었다. 길 위에 올라서면 최선을 다하고, 과정을 즐기면 된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또 다른 나는 연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배려와 친절이 서툴렀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비가 생명에 대한 헌신인 것처럼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에 다녀와서도 사랑은 생명에 대한 무한 존중이며, 두려움 없이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라고 축원을 올렸다.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라." 우주 질서의 하나인 삶과 죽음은 계단을 건너 밖으로 빠져나간다. 깨어 있으라. 깨어 있지 못하면 잠자고 있는 것이다. 버릇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습관을 이길 수 없다. 행동이 바뀌면 깨어 있게 될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을 펴들고 읽으며 혜초를 생각했다. 아리나,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은 신라를 떠나 인도로 갔으나, 현태 스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유학길에서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발길을 돌린 일, 그 먼 오천축까지 고독을 견디고 걸었다. 토굴 안에서 스스로 몸을 가누고 몇 년을 두문불출하며, 마르크폴로나 이븐바투타처럼 평생을 떠돌게 하는 힘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했다는 타클라마칸 사막. 지금이야 카슈가르에서 쿠처까지는 열차로 15시간이면 된다.
낯선 곳의 고통들은 갈라 터진 발바닥과 주린 배를 안고 걷고 또 걸었다. 혜초는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이 담담하게 길의 방향과 기간만 적고 있다.

"다시 소륵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혜초가 간 행로는 기적의 실현이다.

요즈음이라면 비행기나 자동차로 간다지만 혈혈단신 굳센 믿음 하나로 이역만리를 통과했다. 그만큼 고향 계림이 멀어질수록 슬픔도 감추기 어려웠다.

"남인도 가는 길에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어서 누가 소식 전하려 계림으로 날아가리."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다시금 생각해봐도 맞는 말이다.

우리들 역사도 시간과 공간의 부침이 만들어 왔다.

스스로 돕는 용기와 의지가 없었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가 고통을 통해 초인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희망을 자기 안의 영토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한다.

붓다의 고행은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세상의 별이 되었다. 다른 길이 없다.

사람만이 희망이며 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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