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정신으로 가는 길, 해장국 로드
재첩, 황태, 복어, 선지, 뼈다귀, 우거지, 콩나물 등이 주재료
뼈와 살을 도려내는 통증에 힘겨워하는 환자에게 의사는 진통제 투여를 지시한다. 달라는 만큼 놔주라는 말도 덧붙인다. 어차피 통증 빈도는 잦아질 테니. 정맥으로 진통제가 들어가면 환자는 잠에 빠진다. 온화한 표정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 얼굴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망년회 시즌 끝난 줄 알았더니 신년회 시즌이란다. 이거 무슨 국민 오디션도 아니고 패자부활전이란 말인가. 갖다 붙이니 다 술자리다. 연말연시에 수고 많은 식도, 위장, 십이지장, 소장, 대장에 한 번 더 경의를.
오장육부를 헤집어놓는 숙취를 말기 암환자의 통증과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시쳇말로 골 때리는 그 순간 진통제에 버금가는 효과를 주는 '해장국'이 있다.
◆해장국 왜들 이렇게 찾는가
원래 이름은 '해정(解酲)국'이었다. 언어구조상 장(腸)과 관계가 없다. 불타오르고 쓰리던 소화기관이 일시에 진화된다. 먹고 나면 장이 편해졌다. 그때도 느닷없이 나타나는 '맞춤법 교정자'는 있었겠지만, 입에선 단내가 나면서 술이 슬슬 깨고 있는데 굳이 바로 잡을 여력도 없었을 게다. '해장(解腸)국'으로 불려도 그러거나 말거나. 언어의 속성상 한 번 입에 붙으면 아무리 잘못됐다 지적해도 고치기 어렵다.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바꾸려던 시도에서 경험했잖은가.
해장국을 같이 먹는다는 건 엄연히 정무적 행위다. 술 마신 뒤 체력 회복을 꾀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있지만 그보다 과음한 이들의 생사여부 확인 겸 전날의 기억 필름 복원 겸 술값은 누가 계산했는지, 누가 바래다줬는지 등을 확인한다.
특히 전날의 기억 필름 복원으로 팩트 체크 기능을 하기에 술자리에서 맺은 결연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덤으로 술을 누가 더 마셨는지도 따져 주림의 고수들과 비교한다. 랭킹이 정해진다. 서로의 주력을 칭송하고 그런 술자리를 또 만들자는 다짐의 장으로 승화시킨다. 해장국 먹는 시간을 비즈니스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렇기에 무엇을 먹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러나 '의전의 끝판왕'을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해장국 선택은 주종 선택만큼 중요한 절차다.
◆해장국 로드
"으허~" 해장국은 직업,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 넘어 식도를 따라 흐르는 동안 온 몸이 자글자글 풀리며 나오는 소리를 어쩔 것인가. 해장국 전문식당에서 밥을 말아먹다 자연음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오케스트라를 한 번씩들 들어보시라. 1분에 한 번꼴로 들리는 속 풀리는 소리를 모아 듣는다면 퀸이 관객들의 발소리와 박수소리로 만들어낸 'We will rock you'에 버금갈 만하리라.

지난 9월 서울 유명 호텔 한식당에서 이색 보양식 메뉴로 해장국이 등장했다고 한다. '효종갱(曉鍾羹)'이다.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버섯, 표고버섯, 쇠갈비, 해삼, 전복 등 18가지 재료와 토장을 섞어 고아낸 것이라 한다. 일본 스모선수들이 1인분으로 먹어치운다는 창코나베(ちゃんこ鍋)도 아니고 이 정도 재료로 1인분을 만들어 낸다면 국이 아니라 찜이다. 추정컨대 전날 함께 과음한 사람들 모두 어울려 같이 먹을 만큼의 해장국이다.
어머니의 손맛만큼 많다는 해장국의 세계다. 조미료 팍팍 들어간, 매워서 위장이 마비되는 느낌의 육국수 가게를 최고의 해장 식당으로 꼽는 이도 있는 만큼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재료별로 구분해보자면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크게 해산물과 육류로 나뉜다. 기본적으로 단백질 성분이 들어가야 해장이 된다는 거다. 재첩, 황태, 복어, 선지, 우거지, 콩나물 등이 이름을 걸고 술꾼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본지에 소개되지 않아 아쉬운 곳들은 본지 페이스북 계정(www.facebook.com/maeil.shinmun)에 댓글로 달아주면 된다.
-해산물 해장국

해산물의 대표 재료는 복어다. 그런데 대표 가게를 적자니 애매하다. 레시피가 거의 같아서다. 콩나물무침 베이스로 맑은 국물의 '지리'나 '탕'을 국물로 내준다. 못하는 집을 꼽으라면 꼽을 수 있겠으나 각 구역별로 빼어난 집이 하나씩 있을 정도로 해장의 대명사가 됐다.

생태탕도 단백질 덩어리다. 죽전네거리 인근의 '참 맛있어요'라 붙어 있는 가게, 그리고 영대병원네거리 인근의, 간판이 있어도 식당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가게가 유명하다. 두 가게 모두 허름해 보인다는 게 공통점이다.
이마트에 가정간편식으로 스카우트돼 팔리기까지 한 성서쇼핑월드 뒤편의 동태탕 가게도 해장 집합소다. 식당에 한데 섞여 앉아 그치지 않고 밀려드는 손님들을 보노라면 '속 쓰린 사람들 참 많구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콩나물 해장국

'콩나물해장국' 앞에는 '전주'지역명이 붙어줘야 정통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주'가 붙지 않은 콩나물해장국 식당과 해장 기능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난제다. 복어 식당만큼 많은 식당들이 있어 아무데서나 먹어도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다. 멸치로 우려낸 육수인지 황태로 우려낸 육수인지 다시마도 좀 섞여있는지 구분할 미각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복불복 확률을 줄일 방도는 있다. 줄을 서서 먹는다든지, 끼니때를 넘긴 시간임에도 바글바글하게 들어차 있는 곳이라면 확실하다.
-그외 해장국

돼지뼈를 이용한 뼈해장국의 대표는 감자탕이다. 돼지 등뼈를 끓여 만드는 해장국으로 주로 24시간 영업하는 체인점이 많다. 우거지가 같이 들어있어 해장의 균형을 맞춘다.
간 해독에 도움이 된다는 재첩을 재료로 한 곳도 인기가 식지 않는 해장국 전문식당이다. 콩나물에 전주가 빠지면 어색하듯 재첩에는 하동이나 섬진강이 어울린다. MBC네거리 문화웨딩 뒤편 재첩국 가게가 오랜 기간 해장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소나 돼지의 굳은 피, 선지를 사골 육수에 끓여 만드는 선지 해장국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지만 해장국을 언급할 때 첫 손에 꼽힌다. 앞산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곳과 대구시내 국과 밥을 따로 내주는 그 식당이 선지 해장국으로는 인지도가 가장 높다.
이밖에 곰탕, 추어탕 등등이 명함을 내밀 만하나 각자의 식성에 맡긴다. 미꾸라지가 겨울잠을 자는 2월 말까지 영업을 하지 않는 곳도 있으니 확인하고 가야한다.
-짬뽕

아직 팔팔한 소화기 능력으로 해장의 개념이 약한 20대에게 '최애(最愛, 가장 사랑하는) 해장국'으로 꼽힌다. 도시철도 3호선 건들바위역 인근에 있는 이 가게, 어쩌면 짬뽕계의 레전드로 남을지 모르겠다. 돼지뼈를 고아 낸 육수를 베이스로 한다. 주방장의 영혼이 실린 국물이란 평을 받고 있다. 오징어나 홍합 몇 개로 비주얼에만 신경 써 각 재료가 따로 노는 짬뽕이 범접할 수 없는 해장 능력이다.
◆가정간편식으로 날개 단 해장국
사르르 오장육부를 녹이는 국물의 힘은 '해정국'에서 '해장국'으로 바뀌었다. 암묵적 합의로 언어를 바꿀 만큼 국물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표준화된 제조 매뉴얼도 생겼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식품업계는 해장국 시장 수요에 주목했다. 1인 가구 증가로 업계의 해장국 제조 경쟁은 치열해졌다. 가정간편식 시장의 해장국 터줏대감은 북어나 황태를 소재로 한 제품군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가정간편식 시장 규모가 2017년 기준 2조7천억원을 기록했다. 2010년보다 3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대기업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시장에 유명 식당과 외식업체, 지역 농·축협까지 뛰어들며 덩치가 커진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비쌀수록 질이 높은 편이다. 특히 근래 들어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가성비는 물론이고, 집밥을 먹는 듯 심리적 안정감까지 줘 가심비까지 높이겠다는 식품업계의 목표의식 상향으로 일부 제품에서는 해장국 식당을 따라잡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10팩에 7~8만원 선에 팔린다. 낱개에 7~8천원 선이니 일반 식당에서 내놓는 해장국 가격과 큰 차이도 없다. 육개장, 곰탕, 추어탕은 어느새 기본 상품군으로 자리잡았다.
라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해장의 핵심은 국물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라면을 속속 내놓으면서 기대 이상의 품질이라는 뜻의 '쓸고퀄(쓸데없이 高 Quality)'이라는 품평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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