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연기인생, 극단 원각사 대표 김미향

입력 2018-10-04 16:11:24 수정 2018-10-04 21:09:51

영화 ‘밀양’의 김집사 역, 명연기 보여줘

영화 '밀양'에서 극단의 고통(아들의 죽음)을 받고 헤매는 여주인공 전도연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김집사 역을 맡은 여배우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 당시 조연급으로 명연기를 펼친 배우가 바로 대구 출신의 극단 원각사 대표이자 배우인 김미향(1959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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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에 김집사 역으로 출연한 김미향. 영화화면 캡처

김미향은 대구 연극판에서도 할머니나 어머니 역으로 정평이 나있는 중견배우다. 연기경력이 벌써 40년째로 100여 편의 연극 및 뮤지컬 작품에 출연 또는 연출, 기획, 스태프로 참여했다. '제 인생의 후회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창하는 그는 "열악한 제작여건과 가난한 배우생활에 힘들지만, 무대는 제 삶의 전부나 다름없다"고 확신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연극과 함께 할 계획이다. 건강관리를 잘해서, 아직 무대 위에서 체력고갈로 인한 에너지 부족은 없다. 불과 1달여 전에도 우전소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행복한家'에 어머니 역으로 출연해 열연을 펼쳤다. 공휴일인 3일 개천절에 김미향을 만나 지나온 40년을 돌아보고, 그만의 연기인생을 들어봤다.

"할매·엄마 역을 많이 했지만, 후회없죠." 연기인생 40년의 극단 원각사 대표 김미향. 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극단 원각사 초대 대표 이필동 선생과의 인연

김미향은 대구 제일여상을 졸업하고 대구백화점 방송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릴 적 영화광이었던 어머니를 따라서 밤늦게 영화를 보러 다니고, 집에 오면 배우들의 대사는 따라하기를 즐겨했다. 요즘으로 치면, '성대모사'인 셈. 또 틈만 나면 라디오나 TV에 나오는 코멘트를 흉내내며, 성우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동성로 길거리에서 '극단 원각사 배우모집'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날 무작정 찾아갔고,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고(故) 이필동 선생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됐다. 이필동 선생은 연극에 대한 무한여정으로 무장한 김미향을 많이 아껴줬다.

원각사 배우로 입단해 '연인과 타인' 데뷔작을 시작으로 '칠산리', '수전노', '무엇이 될고 하니' 등 수많은 작품의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배역은 언제난 할머니 또는 어머니 역이었다. 때로는 못된 시어머니, 나쁜 며느리 등 악역으로도 명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밀양'에 출연한 것도 이필동 선생이 당시 유명 영화감독 이창동과 함께 한 저녁자리에 덕분이다. 당시 이창동 감독은 김미향에게 '일단 카메라 테스트부터 받아보자'고 제안했고, 수차례의 테스트를 거쳐 김집사 역에 낙점됐다.

"20대부터 아름다운 처자나 연인 역 대신에 노인역 또는 엄마역 전문배우가 됐습니다. 가끔 제 외모 탓을 하기도 하지만 연극 무대에서의 희열을 생각하면 배역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김미향은 무대를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배우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그 숨결에 짜릿함을 느낀다. 더불어 연극만이 줄 수 있는 현장성을 즐긴다. 같은 공연이라도 매번 다른 느낌, 관객과 주고 받는 호흡과 에너지 등은 삶의 원동력이 됐다.

◆결혼한 대구 여배우 1호, "애 업고 연습나가"

원각사 소속 배우로 활동하면서, 다소 늦게 계명대 독어독문학과에 입학(82학번)한 김미향은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무대에 오른 대구 여배우 1호다. 이 때문에 남편과도 투쟁하듯 싸웠다. 어린 애기를 업고 나와, 연극연습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때문에 자녀 역시 엄마와 함께 한 어린 시절 연극판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내의 강력한 연기의지를 결코 막지 못한다고 판단한 남편은 어느샌가 응원군으로 변신했다.

젊은 날의 연기열정은 보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제31회, 33회 대구연극제에서는 총괄제작으로 참여해 대상을 수상했으며, 제 6·8·13회 연극제에서는 배우로 출연해 연기상을 받았다. 제31회 대구연극제 대상을 수상한 '꽃바우 할매'는 전국연극제 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해외공연의 좋은 추억도 간직하고 있다. ▷'무엇이 될고 하니'(박우춘 극본, 이필동 연출/ 1997년 4월 프랑스 파리) ▷'이대감 망할 대감'(박승희 극본, 이필동 연출/ 1999년 2월 인도 캘커타 뮤지움) ▷'꽃마차는 달려간다'(김태수 극본, 이남기 연출/ 2002년 10월 뉴질랜드 오클랜드)

김미향은 40년 연기인생을 이렇게 돌아봤다. "연극배우라는 직업이 제 인생의 천직이 맞습니다. 무대에 대한 갈증은 아직도 많습니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에서 제 스스로 창출해낸 캐릭터에 대한 뿌듯함도 있지만 앞으로 맡게 될 좋은 배역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가슴 속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은 끄덕 없겠죠.(하하)"

◆"원각사 김미향 주지 스님입니까?"

이필동 선생은 대한민국 최초의 소극장 '원각사'라는 이름을 따서 향토 최초 극단을 1977년에 창단했는데, 이를 이어받은 김미향 대표를 가르켜 '원각사 주지 스님' 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라고 놀린다. 이런 놀림을 받을 때마다 김 대표는 '극단명을 한번 바꿔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이필동 선생이 지은 '극단 원각사'라는 이름을 꿋꿋하게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 앞으로도 김미향은 영원한 원각사 소속 배우이자 대표로 남을 것이다.

댓바람에 "극단 수입이 좀 있냐"고 묻자, "20년 전부터 학교현장에서 연극으로 학생들을 지도했으며, 올해 초에 명지대 예술심리치료학 석사를 졸업했다"며 "전국 초·중·고 진로교사 및 예술심리치료사로 활동하며 생기는 강의료 등을 극단 운영에 보태고 있으며, 보통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번씩 영화나 TV드라마 출연은 과외수입이다. 영화 '밀양' 뿐 아니라 '나무 없는 산'(고모 역), '밍크 코트'(명순 역)에도 출연했으며, TV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도 나왔다. 해외 영화제 초청을 위한 영화 '산다', '눈길', '게이트', '벌새' 등에도 다수 출연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가 이필동 선생 10주기인데, 생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포스가 생각이 많이 납니다. 모든 분야에 박학다식해 하루 종일 얘기를 듣고 있어도 지겹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에게 늘 자상하게 대해주셔서 '영원한 선생님'으로 생각합니다. 원각사의 제2의 전성기가 오겠죠?(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