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옥정숙 '인생 유감(有感)'

입력 2018-07-25 14:55:24 수정 2018-07-25 15:23:17

1. 부고(訃告)

" 조금 전에 권사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해운대 요양병원에서 부음 전화가 온 것이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돌아가신 이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나를 처녀의 몸으로 안고, 업고, 키워준 내

친정 고모님이셨다. 세수(世數) 87년.

강물이 바다에 이르기 위해 강을 버리고 떠나듯,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실만한 때에 당도한 일이려니, 하세(下世)에 시난고난 없이 평안하게 임종을 맞으신 일을 큰 복이라 여기면서도 거짓말 같은 상사(喪事)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 아메(아마)도 ...인자(이제)내가 종점에 다... 온 거 것다"

독감으로 누운 지가 사흘째란 말을 듣고 전날 부리나케 문병을 갔더니 나를 보고 한 독백이었다. 누구라도 임종이 가까우면 영이 맑아져 자기 돌아갈 때를 안다더니, 뜬금없는 탄회에 펄쩍 놀라 순간적으로 쿵, 가슴 무너지는 소리가 벼락같았다.

"... 까짓 독감한테 항복하고 싶은교 ?"

그 와중에 짐짓 싱겁을 떨어놓고 침상 아래 무릎을 접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자, 검불처럼 가벼운 손을 내 정수리에 얹어놓고

"나이만 묵었지...아(아이), 강..가에... 세워 논(놓은) 거...같은데..."

70이나 되는 나도 당신한텐 어린애였던지, 짚불같이 잦아드는 와중에도 그 사랑의 염려가, 징소리의 잔향같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유독 반발심도 거세고 성에 차지 않으면 따지기도 잘하던 내게, 호통과 질타보다는 " 언제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귀로만 듣지 말고, 가슴으로 받고 새겨야

원망이나 오해가 없다. 하이그, 이 야당 당수 같은 아가씨야... "

웃으며 다독이던 때가 불과 어제 일만 같은데 해일이 덮치듯 창졸간에 접한 비보가 유명(幽明)의 단절이라니...그예 명줄을 놓아버린 상사(喪事)가 그지없이 허망 하였다.바투 있어도 그리움은 언제나 물마루 같았던 못 잊을 한 사람, 저 공활한 우주에 한 점 유성으로 떨어지고, 허무하게도 한 생의 페이지는 그렇게 넘어가버렸다.

어제 보고 온 사람이 오늘은 세상에 없는 현실이 당최 실감이 나질 않아 동네 닭들이 목청껏 홰를 치도록 뒤척이며 사유해본 인생이란, 무상으로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살다가 때가 되면 홀연히 지구촌 밖으로 떠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랑도, 친구도, 그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는 만고의 길 위에, 어떤 권력자도 권세로써 갈 차례를 바꿀 수가 없는 영원의 나그네... 결국 사망이란 살아있는 모든 의미의 종결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삶의 한 영역에 속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체념하게 되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기에 심란한 속내가 바람막이 없는 난장(亂場) 같았다.

아, 이제는 내 차례구나,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윤리적인 순서로 통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 죽음이란 엄연함을 누가 모르리. 자연의 운행 법칙에 따라 '홍시도 떨어지고, 땡감도 떨어지지만 거친 세로(世路)에 느닷없이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소외감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통렬하게 비감을 더하였던 것은 황혼에 이르러 온전한 내편과 구심점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었다.

'사람이 쓰고 있는 것 중에 제일 귀중한 것이 시간'이라면 백년도 못 채우고 가는 삶일진대 치열하게 살아도 아쉬운 것투성이인 것을 아뿔싸,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허랑(虛浪)하게 보낸 세월이 얼마였던가, 훗날 자리에 누운 채 후회하지 않으려면 당장 오늘부터라도 시간 운용을 잘 해야지 싶은 순간, 누가 등을 탁, 치듯 의식의 표면위로 치솟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세월호 같은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냉각 상태에서 속앓이가 극심했던 큰애(맏며느리)와의 숙제와, 그동안 속으로만 잔뜩 벼르고 있었던 유언장 작성이란 과제 두 가지였다.

정녕 가리사니가 없는 사람도 아니면서 어미란 자가, 자식의 일대사에 씻을 수 없는 흠집을 내어놓고 지나간 뒤에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번민하는 못나빠진 작태라니...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구태의연하게 반상(班常)을 가림으로 야기된 문제이다 보니 차마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남우세스러운 일. 어찌할꼬.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인지 몰라 종당에는 서로의 상처만 산악(山岳)같이 되어버린 난제였다. 그러기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오류를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치유가 될 수 있도록 수습하고 싶은데, 깨어진 항아리를 접착제로 붙인다고 흔적까지 없앨 수야 있으랴만, 그나마도 내가 더 늙기 전에 시도해야지 미적거려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 아궁이 앞에 철부지를 앉혀둔 것 마냥 마음이 화급하였다.

'톱은 잘 베어 들어가지만 부러지기도 한다'는 옛말처럼, 사단의 빌미를 제공한 원

흉이 바로 나 자신인 만치, 관련한 일에 대해선 결과가 어떻든 기꺼이 감수하리란 각오가 굳건하였다. 다만 남한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가정사라 혼자서 감내해야 했던 마음고생이나 스트레스의 증후들은 극을 치달았다. 그 화증으로 원형 탈모를 비롯하여,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 부득이 한의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의 생각 중에 한 번 실수는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번의 생각 중에 한 가지 소득은 있을 수 있다.'는 옛말을 그나마 자위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울화를 인내하였다. 차제에 혈족과의 사별은 나 자신을 찬찬히 돌아보고 정비할 수 있는 기회랄까,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어준 셈이다.

2. 자작자수(自作自受)

화근의 발단은 장남의 혼사가 거론 될 무렵인 10년 전, 사돈댁이 무속인이란 사실에 질겁을 한 내가, 혼인을 결사반대 하고 나선 일이 종내 사단(事端)이 난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 인생 철학은 옳은 것과 정의로운 것, 그리고 인간의 격조(格調)와 진실에 산다는 신념이었다.

당시에 아들놈이 결혼을 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며 그 애 민정(가명)이를 소개했을 때, 굳이 흠을 잡자면 아가씨가 정서적으로 안정돼 보이지가 않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무난하고 용모도 여성스러웠다. 대학 동창으로부터 소개를 받았다는데 처음 본 순간 마음에 들더라는 자식 놈의 소견에 오냐, 그렇다면 나도 됐다 싶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고부간이 되리란 포부와 기대에 잠시지만 행복하였다. 그중에 굳이 께름칙한 문제를 가린다면 신부 될 아가씨한테 10년 동안 교제해 온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내심 쾌청하질 않았으나, 기실 이성 친구 문제는 연령적으로 청춘의 분수령이란 때를 감안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돈 되실 분이 귀신을 부리는 영매(靈媒)란 사실은 상상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라 당혹스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낭패 그 자체였다. 그것은 필경 무의식 저변에 엎디어 있었던 양반과 상민에 대한 내 보수적인 가치관과 무관치 않은 거부감일 터였다.

자고로 '나무를 일컫는 자가 반드시 소나무와 잣나무를 으뜸으로 꼽는 것은, 근본이 확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서리와 눈을 능멸하는 기상과, 나뭇결이 곧고 재목이 아름다운 것 때문'이라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사냥꾼은 좋은 사냥개를 얻으려 하고, 말 타는 사람은 좋은 말을 얻으려 한다'는 데 마땅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랴. 하물며 인륜지대사라는 혼사에서야 더 이를 말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내 신념하고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제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이 자존심이라면 나는 그 정도가 중증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으니 사단과 무관치 않을 터였다. 허긴, 반드시 헐어버려야 할 바벨탑 같은 것이야 누군들 한, 두 개쯤 없는 이가 있을까만, 내 정체성과 가치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자존심을 초토화 시키고 그 상처의 여파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다시없는 동통을 앓는다면 분명 과보(果報)일 것이었다.

'봄 꿩이 제 울음에 죽는 것'과 같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處事)를 통해서 자신의 관념적 편견을 자각한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본다면 인간적이란 해석도 가능하지만, 온갖 일에 모범답안만을 추구하는 의지에 스스로 반(反)하는 우를 범했다는 측면에선 도리 없이 자기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허기사 '가장 좋은 술에도 찌꺼기가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세상에다 바칠 수밖에 없는 존재세(存在稅)라 여기면 뭐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구름을 일으켜 놓고 지금은 비가 온다고' 투덜대는 양상이라니, 스스로도 기가 차고 안타까웠다.

3. 이것이 인생이다

사람들은 세월을 두고 쏜 살같이 빠르다는 말을 하는데 과연 내 갈등의 시간들도 어느 새 10년이나 후딱 지나가버렸다. 그 세월의 대부분을 자신의 과오에 대한 자책으로 써버리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날을 살았다. 하지만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듯이 당시의 소견으로는 경순왕 28대손, 기세 성만(盛滿)한 가문의 자손이, 무속인의 여식과 혼인이라니 일고의 여지도 없는 일로서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혼사란 것이 단순히 신랑 각시 두 사람만의 일이어야 말이지, 모름지기 두 가문과의 결합이기도 하다는 것이 평소 내 주관이자 신조였던 만큼 열 번 뒤집어 생각해도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원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자식과, 무속인 집안과의 결합을 반대하는 입장인 어미간의 대치랄지, 고집이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을 즈음, 그래, 자식 하나 안 낳은 셈 치지, 난 아들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였다. 아니라고 판단하면 대쪽 가르듯 단박에 해치우는 말뚝 같은 성정이, 일생에 한 번인 자식의 대사(大事)에도 칼로 무 자르듯 결단해버렸으니 실로 다시없는 독선일 것이었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지금은 사람이 달나라에도 갔다 오는 세상인데, 정작 신분을 따져서 자식의 혼사를 반대한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니 때리는 사람도 없는데 매 맞는 것 같은 동통이 끝 간 데를 모르고 기승하였다. 자신의 처사(處事)가 어미로서 참 못할 짓이다, 정말 이 방법밖에 도리가 없는 것일까, 끊임없는 자성(自省)으로 그 밤 내내 참담하고 기막혔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동리(洞里) 뒷산 산머리에 우뚝 섰는 송전탑도 이 산, 저 산, 넘어가는 전선줄을 꽉 붙잡고 지지하는 덕에 전선들이 마음 놓고 산 너머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바람에 깊은 두메 산골짜기 숙묵(宿墨)같은 어둠도 대낮같이 훠언한 전기가 들어오고, 인터넷이야, 스마트 폰이야, 안 터지는 데가 없이 각각 제 역할을 십이분 발휘하고 있는데, 하물며 어미란 사람인 나는 자식을 굳건히 잡아주긴 커녕, 살아선 못 잊을 상처를 입혔으니 내색하지 않는 녀석의 아픔인들 오죽할 것인가. 자고로

'자식은 어미의 닻이요, 어미는 눈보라에도 모닥불을 붙이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나는 독불장군 같은 아집으로 갈등만 증폭시킨 꼴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어즈버, 이보다 더 못나고 기막힌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분별없는 통증이 내창을 흔들었다.

혼례식에 참례치 않을 것이라고 작정은 하였으나 번민 때문에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매사를 격의 없이 터놓고 토로할 수 있는 시동생한테 의논 삼아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없으니 사실상 애들한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다. 시숙 한분이 있었지만 그는 지극히 관료적인 사람이라 나하고는 지내는 사이가 소원(疏遠)해서 시어른이 돌아가신 후로는 집 안팎의 내 의논 상대는

주로 시동생이었다.

" 일이 이 지경이니 아무래도 결혼식 날 서방님이 동서하고 저 대신 일을 좀

보셔야겠어요. 그냥 모른 체 하려니까 녀석이 너무 가엾어서 가슴이 아파요."

평소 무슨 일이든 정도를 벗어나는 법 없이,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 자기 형수라고 믿는 시동생은 그 와중에도 위로를 잊지 않아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에 참으로 고맙고 의지가 되었다.

" 형수님, 기왕에 교통정리를 그리 하셨으면 마음 넉넉하게 가지시고, 이미

정한 일로 속 끓이진 마세요.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우리 훈이 판단을 한 번 믿어 보자구요.

세상 일이 호락호락 그렇게 다 맘대로만 된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

설마 하던 일이 실재상황이 되어 산(生)어미를 두고도 어미 없는 혼례식을 진행하게 되었으니 녀석의 비애나 참담함은 오죽했을까. 상처인들 얼마나 깊고 클 것이며 충격은 또 얼마나... 품안에서 키우던 여린 새 한 마리, 이제 마악 둥지 밖으로 나가 날개 짓을 하려는데 어미란 사람이 그 날개 한쪽을 다치게 한 비정함이라니...

세상에 나와서 어른이 되고 어미란 이름에도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건만, 내 생애를 통 털어 그렇게 참담하고 기막힌 슬픔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남편과의 사별도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이날까지 나는, 자식이 살고 있는 집이 어느 지역이란 소리만 들었지, 무슨 동(洞), 무슨 아파트인지, 며느리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이 외계인처럼 살고 있다. 손녀가 태어나 7살이 되도록 딱 2번, 지애비가 안고 온 애기를 본 것이 전부이다. 내 자식 속에서 나온 강아지라 생각만 해도 속이 자글자글한데, 그걸 목소리는커녕 보여주지도 않는 걸 보면서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리도 치를 떨까 싶어 정녕 괘씸한 맘 보다는 안타깝고 가여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막을 아는 지인이나 친척들은

" 아니, 세상에 무슨 이런 발칙한 경우가 다 있대? 아망스러워도 유분수지..."

" ... 쯧쯧쯧, 지훈이 녀석이 대가 차질 못해 지집한테 휘둘려서 그런 걸 남에 딸

나무랄 것 뭐있어,,,, "

각자 성화들이었지만, 틀린 지적은 아니로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상처를 받은 건 녀석이라고 다를 것이 없는 데다 그 빌미를 제공한 원흉이 바로 제어미란 사실이 지 안사람한테 얼마나 면목 없고 미안한 노릇일 것인가.

하기는, 저간에 관계개선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손뼉을 치려해도 마주칠 손이 하나뿐이라면 무슨 수로 박수를 칠까. 며느리의 반응이 워낙에 냉담해서 재 시도는 거의 포기랄까, 체념상태에 있었다. 절망스럽고, 무안하기도 하고, 무시를 당했다는 모멸감 자체가 수모로 느껴져서 평소엔 그 문제를 생각하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이미 땅에 떨어진 꽃도 봄이 오면 가지마다 또다시 새로운 꽃망울이 터지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니던가. 생전에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고 가리라,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숙제는 항상 의식의 저변에 앙금처럼 갈아 앉아서 틈만 나면 지병 도지 듯하였다. 때문에 사실상 속으론 하루도 평화가 없었다. 마음고생이 그만하면 도(道)라도 통할 것 같지만 구한다고 해서 다 득도(得道)를 한대서야 어디 그게 도라고 할 수나 있을 것이던가. 며느리가 마음을 열 때까지 어떻게든 이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심리적 부담이나 껄끄러움도 만만치가 않아 허구한 날 사과해야지, 내일은 해봐야지, 구실을 찾기 바빴고, 자의 반, 타의 반,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여기서 또 미룬다면 영영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초조하였다.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아는 시동생은 애가 터지니까 나만 보면 성화였다.

" ... 지훈이 이 녀석, 믿을만하다고 걱정도 안 했더니 천하에 못난 넘...

지 안사람 하나 다루지 못해 그 모양이래요? 불알 찬값도 못하는 칠칠맞은 녀석

같으니라구... 그러구, 그애(며느리)도 그러면 안 되죠. 설 명절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데 아망스럽게 제 집에 들앉아서 어른을 능멸해요?

그러니까 반상(班常)을 가린단 밖에...

무릎 쓰고 혼인을 했으면, 서운한 것도, 먼저 기본 도리부터 하고나서 이러구 저러구 해 볼 일이지, 천지 어디에 이런 법이 있냐구요!

형수님은 참 대애단한 며느님을 두신 것 같습니다. "

생각할수록 괘씸하다는 듯 시동생이 더 안타까워 야단이었다.

"... !, ... 어미란 사람이 즤들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훈인들 지 안사람한테

무슨 면목이 있겠어요. 어찌 보면 민정이도 정직한 애예요.

속에 앙금이 있는데 뭐가 좋아 아닌 척 가식을 떨고 싶겠냐구요.

모르긴 해도 아마 '당신 엄마가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데' 하고 기회만 있으면

훈이를 갉았을 텐데 녀석도 시달리다 보면 한, 두 번도 아닐 테고 끔찍할 거

아니겠어요?

... 듣자니까 생전에 사부인이 훈이 보고 그러더래요.

김 서방, 민정이가 아직 철이 없어 저 모양이니 자네가 시간을 좀 가지고

기다려 주시게, 내가 잘 못 갈쳐서 그러니 대신 사과 함세, 참으로 잘못 되었네,

미안하게 되었어. "

그 소릴 들으니까 간이 철렁 내려앉던걸요. 사리를 아는 그리 고운 사람을

욕보였구나, 싶어 부끄러워지더라니까요.

...그 애가 치떨려하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미움보다는 안쓰러워서

생각할수록 속도 상하고... 내가 참 모진 짓을 했구나, 빌고 싶은 심정이에요."

빌고 싶단 내 말에 삼촌은 마치 천지개벽하는 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낯빛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녕 뜻밖이란 의미의 얼굴이었다.

4. 인간은 교육하는 대로 교육되어 진다

인륜지대사라는 그 막중한 자식의 혼사에 흠을 내고 말았다는 자책이 한마음으로 사무쳐서 괴로웠다. 그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자위책을 궁구하다 보면 매번 '인간은 교육하는 대로 교육되어 진다'는 말이 생각나고,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할머니가 떠올랐다.

말뚝같이 결벽한 내 성정이 필경은 양육한 사람의 훈육방식에 의한 결과물이란 측면에서 성장과정에 관한 감상(感想)이 매번 소소리 바람에 너울 일듯하였다. 정서나 인성이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랄 때의 환경과 키우는 사람의 인격, 품성, 교양 등에 노출이 되면 곧 자아 정체성으로 고정, 흡수되게 돼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였다.

어떤 문제에 해답이 이거다, 싶으면 뒤도 안 보고 곧 바로 시행하는 추진력은, 소리 없이 묵묵히 흘러가는 큰 강물이기 보다는 바위에서 계곡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힘 같은 할머니의 영향력을 여과 없이 받았다는 측면에서 더러 회의를 느꼈다. 미워하면서 배운다더니, 할머니의 엄격이나 완고함은 조금도 닮고 싶지 않았음에도, 이런저런 상황을 통해 그러한 징후들을 발견하게 될 적마다 속으로 적잖이 놀란다. 때문에 신분에 관한 자존감이나 상대를 한 수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되먹잖은 우월감 등은 자식의 혼사에도 가차 없이 결정타를 휘두르고 말았으니, 결국 내가 지은 문제에 내가 치어버린 결과를 낳은 셈이다.

돈만 많으면 교양이나 인격과는 무관하게 귀족이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한심하게도 무속인과 사돈이 될 수 없다는 오만은 대체 무얼 믿고 부렸던 횡포였을까. 오만가지를 버튼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멀티플(multiple)한 세상을 누리는 와중에 신분의 귀천(貴賤)을 가려 생애 가운데 오류를 남기다니, 대체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며 사고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 와중에 다른 것은 몰라도 혼사가 단순히 두 사람만의 결합은 아니라는 기본 신조만은 흔들림이 없다.

앞에 잠시 할머니를 빙자한 까닭은, 결정적인 순간에 과단성을 발휘하는 내 성정의 이해를 돕기 위해선 변죽만 울릴 것이 아니라 편린이나마 유년의 성장 과정에 관한 언급이 조금은 필요할 것 같아서이다.

사고로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나는, 엄격한 할머니 슬하에서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병아리 같은 핏줄, 요람에서 보호하는 것이라 믿으신 할머니의 속내는, 훗날 당신의 손녀가 어미, 아비 없이 막 자랐단 소리를 들어선 안 된다는 의지가 옴나위없는 빌미였을 테지만, 계엄령 같은 통제와 과잉보호가 철부지한테 과연 긍정적이기만 했을까, 당근과 채찍이 편중된 건 아니었는지, 간혹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문중 종가(宗家)의 종부(宗婦)이신 내 할머니는 일가 종친들로부터 깍듯한 예우와 존중으로 떠받들렸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 안과 밖이 엄중하기로 여축없는 어른이셨다. 놋화로에 재로 덮은 잉걸불을 담아놓은 듯 구중궁궐 깊은 속내에 그리 따신 사랑을 넣어놓고도, 그 마저도 허투루 드러내는 법 없이 정숙하여, 내 유치한 소견에는 응석 한 번 제대로 안 받아준 할머니가 하도 야속해,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혼자 눈물 뚝뚝 흘리다가 잠이 들기 다반사였다.

앞서 떠난 자식을 가슴에다 묻고, 거기서 나온 여린 싹 하나 애오라지 소중하고 막중하여 애면글면하신, 굴우물 같은 속뜻을 어리고 미숙한 아이가 무슨 짐작인들 할 수나 있었으리오. 아쉬울 것 없는 대가의 살림살이에 두루 능소능대(能小能大)하시고 온갖 일의 대응 처사(處事)가 능숙하여 이웃 고을까지 여중장부(女中丈夫)란 별호로 명성이 드높았던 그런 분이 내 할머니셨다.

당신께서는 이따금 작금의 세상이 옛날 같지 않다고 탄식을 하실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염두에 병아리 같은 손녀가 있었으므로 변화하는 세태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비록 여식이긴 하나, 그러기에 더더욱 범사에 경쟁력을 갖춘 실력자로 성장하길 바라는 원(願)이 의중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세상을 버린 후에라도, 세사(世事)의 찬바람과 온갖 불이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길 원하는 소망이, 이따금 하시는 말씀 가운데에도 있었다.

"지 밥그릇은 지가 챙길 수 있도록 갈쳐놓고 가야 될 낀데... "

아녀자의 기본 행실이나 법도에 대해서도 대강 대강이란 어림없는 일이었다. 명절

같은 때는, 우리 숙모들이 문안을 드리고 안방에서 나갈 때, 자칫 엉덩이가 어른들 쪽으로 향했다간 옴나위없는 걱정에다 일장 훈계를 들어야만했다. 나를 빙자하시며 예의범절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갈쳐야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셨는데

" 우리 선산에 직간대송(直幹大松)도, 근본은 종자디끼(듯이) 부모가 자슥을

올바르기 키우는 것도 나무 키우는 거하고 또옥(똑) 같따.

사램이 남글(나무를) 심으마(심으면) 뿌링이부터 잘 가꽈야 되는 이치가, 딴기 아이다.

(아니다) 후-제 그 남기(나무가) 성목(成木)이 됐을 때 척, 보마(보면) 정성을

우째 딜이(들이)고 키왔는지 다 짐작을 할 수가 있는 기거등.

동지섣달 삭풍한설(朔風寒雪)이 모진 것 거태도(같아도), 그 바람에

남(나무)기 뿌링이(뿌리)를 더 짚이(깊이)박고, 넓기 뻗는 기다.

가지 하난들 어데 배액지 (괜히) 치건데 ? ..."

웅숭깊은 그 말씀의 저의가 만에 하나라도 내게 대한 정훈(庭訓)교육을 허수히 간과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일 터였다.

" 아이구, 인자(이제)는 입이 씹다(쓰다). "

나중에 지친 기색을 보일라치면 행여 그 심기를 흐릴라, 딴에는 나도 총기(聰氣)를

모아야만 했었다. 그 가운데서 또 귀가 닳도록 들은 소리가

"안들(여자, 아내)이 조신하지 못하고 어른들 말씀에 요요, 하고 나서는 것이나

몸가짐이 수싯대(수수대) 맨쿠로 뻣뻣한 건 짝에도 몬 씬다 (못쓴다).

사나(사내) 촐싹거리는 거는 천하에 불출이고, 지집(계집)이 응티(고집) 쎈 거는

매를 부른다."는 훈수였다.

상궤(常軌)를 벗어남이 없는 할머니는 신분의 귀천을 가림에도 반상(班常)의

규계(規戒)가 엄정하셨다. 특히 당시의 백정이나 무당을 극천으로 치부하였는데, 그들의 행태가 직간접으로 상식의 기준을 거스를 경우엔 할머니의 탄식이 심각하였다.

" 조선에 천민이 여럿이라도 기중(그중에) 몬한기(못한 것이) 무당하고 백정이다.

그런데 요새는 시상(세상)이 우찌될라꼬 지분수도 모르고 꺼들거리는 것들이

수태기(숱하게) 있어 가당찮다... "

사실 백정이나 무당은 내가 어린애일 당시만 해도, 동리로 무관하게 들어와 어울리지 못하고 동구 밖에서 살던 시절이긴 하였다.

백정의 경우를 예로 하나 들자면, 할머니는 당년(當年)의 묘사(墓祀) 때는 머슴을 시켜서 동구 밖에 사는 백정에게 돼지를 잡으라는 기별을 넣으셨다. 그러면 나중에 지개에다 고기를 지고 온 백정이 우리 집 중문 짬에서 헛기침으로 자신의 내방을 알렸고, 할머니는 대청마루에서 당연한 듯 그 분의 하정배(下庭拜)를 받았다. 그 당시 교육자이시던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학자풍의 어진 인품의 어른이셨으나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할머니는 그렇게 명실상부한 가문의 총 사령관(?)이 되신 셈이었다.

헌데 손(孫)이 귀한 집에 종손(宗孫)이신 내 아버지한테 자손이 없자 할머니는 당

신이 믿는 부처님께 100일 치성을 드렸다는데 후에 얻은 결과물이 정작 바라던 손자가 아니라, 당신 표현대로라면, 머리카락이 산적같이 시커멓게 얼굴을 덮은, 나란 물건(?)이 나온 바람에 실망이 얼마나 컸으면 대청마루에 다리를 뻗고 앉아 우셨다는 소릴 들었다. 집안의 대(代)가 끊어지게 생겼다는 낭패감 때문이었겠지만 후에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에도 왕왕

"아이구, 지수(智洙)야, 머어시(무엇이) 그리 급하더노, 마, 하나 달고 나오지 ...:"

하시는 푸념을 제법 자라도록 들었다. 얼마나 사무치는 한이었으면, 수명이나 지혜가 강(江)같은 염원의 사내아이 아명(兒名)을 따로 지어 불렀을까.

가뜩이나 계집아이 낳고, 가시방석이었을 내 어머니 생각을 하면, 이런 순, 독재자 같은 할망구, 싶기도 했었지만 그것이 할머니 방식의 또 다른 사랑임을 알기에 언제나 내 마음속 은은한 등불의 촉수로 살아계신다.

비록 손녀이긴 했으나 당신의 핏줄이므로 할머니한테 귀하기론 손녀도 손자나 다름 아니었던지 난 전형적인 시골이 고향이지만 봄이면 나물 캐러 간다고 들판으로 한 번 나가 본 적도 없이 갇혀 자랐다. 친구들 따라 들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쓸라치면

" 지수야이, 우리 두란(뒤란)에 쑥 쌔비맀더라, 거어(거기) 가서 캐오니라, 가보래 "

하셨고, 봄날이면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 지수야, 뒷동산에 참꽃 따러 가자 "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 하이구, 안날에 남산 호랭이가 아랫 마실, 씨불네(말이 많은 마을 할미) 집

돼지새끼를 마, 물고 갔다 카더라.

어지(어제) 우리 이상(머슴 이씨)이 하는 소리 안 들리더나 ? "

" ... ?!... "

문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속내를, 그런 식으로 빙자하시면, 하도 서운해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섰는 날보고, 할머니는 얼른 당신의 저고리 고름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그러셨다.

" 아이구, 이 닭똥거튼 눈물이 어데서 자꾸 이래 나와 쌌노,

지수야이, 우지마라, 니는 조선 천지 요래, 딱, 하나 배끼(밖에)없는

내 강생이(강아지)인기라, 보물!...

산에는 호랭이 살제, 뱀이도 나오제, 할미는 뱀이 무서버 죽겠던데

니는 안 무섭더나?

" ...!...! ... "

조손간이라 금방 화해 분위기로 바뀌지만, 안 될 일엔 바로 체념을 익힌 것도 필경 그런 식의 과보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따라서 야산의 봄 진달래는 항상 우리 집 이상((李氏)이 들에 갔다 돌아올 때 바지게 끝에다 한들한들 얹어다주는 꽃다발로 만족하고 행복하였다. 계집하고 사기그릇은 내어 돌리면 깨어진다는 것이 내 할머니의 생활 신조였음을 나중에 커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요새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가면 내가 자주 듣게 되는 말 중에 보스 기질이 강하단 소리를 단골로 접하는 까닭인즉, 이 또한 조상(할머니) 탓이다, 싶은 것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길

" 우리 가문에 무녀리 없다. 뭣이든 조구(조기)대가리라도 대가리가 돼야지,

꼬랑뎅이는 안 된다 "

그러한 할머니의 주장이랄까, 정신 교육은 내 무의식 저변에 앙금처럼 가라앉아서

아마도 전체적인 내 사고를 간섭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지나치게 엄격한 할머니의 주입식 교육이나, 내게 대한 기대가 압박으로 느껴지면 심통이 사나워진 내가 사내아이 짓거리를 하곤 했는데 알고 보면 그것은 내 방식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필경 야단맞을 것이란 내 짐작과는 달리, 그때 할머니의 반응은 얼굴 가득 화안한 웃음을 담고 유쾌해 하셨다.

"하이그, 어데서 가문에 없는 저런 중사우(중사위) 거튼(같은) 아아(애)가 나왔시꼬? "

할머니가 보여준 그런 의외의 모습은, 그것이 그것다울 때 아름답다는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던 분으로선 파격적인 일면 일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당신은 손녀인 내게서, 보다 늠연(凜然)한 기상이나 은연중 일당백(一當百)인, 사내 같은 늧을 기대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대리만족이란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

일반론이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원칙대로 이상을 좇으며 살아간다. 참되고,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믿으면서'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성정에다 결벽하고 보수적인 만큼, 딴에는 절제와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 할 일이 무엇인가 자신만만, 당당하게 살았었다. 헌데 정작 자식의 일에는 난제(難題)를 낳았는가 자문하게 될 때, 안타깝지만 그것은 필경 내 의식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어쭙잖은 우월의식의 결과였음에, 싸아아 한 줄기 찬바람이 가슴을 쓸어간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할머니는 '무릇 계집이든 사내든 얼(氷)락, 녹을 락이 있어야 하고, 능소능대' 함이 바람직한 것임을 주창하신 만큼 나를 그리 키우려는 의지이셨으나 난 그 근방에도 이르지 못한 외통수로서, 자식의 혼사에 관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끔직한 자괴감에 시달린다. 굳이 자위를 하자면 서적보다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세월을 따라 비로소 지나간 삶의 궁달(窮達)과, 무지로 인해 미련하고 융통성 없이 저지른 자신의 어리석음을 연륜으로부터 깨우치고 배운다는 사실이다.

행실의 근본원칙에 치중하신 할머니가 내겐 반듯한 기둥 각이었다면 당혼(當婚)의 처녀였던 내 고모는 당신의 모친께서 세우신 각의 모서리를 시나브로 유연하고 둥글게 다듬어주신 덕분에 '시냇물에 돌 닳듯' 오늘날 내가 이만큼이나마 사람 노릇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자식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만 아픔을 초래하긴 하였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통제와 과잉보호가 능사는 아닌 게 분명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제재 가운데서도 어떤 식으로든 참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은, 훈육 방식에 따라 반대 급부적 일면이 긍정의 힘으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인,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따라서 내 제자리 방망이식 아만은 필경 연구대상 감이라 자처하는 터이지만 원론적이든 결론적이든, 이제나마 자신의 문제가 무엇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하는 유, 소년기엔 키우는 사람의 인격이나 훈육방식이 평생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중요한 것인지 나를 보면 안다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이렇게 사설이 길어지고 말았다.

5. 과보와 아픔

생각해보면 어미의 가혹한 처사에 상처나 충격을 받은 것은 아들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으련만 나 같은 어미도 어미라고 궂은 내색 한번 없이 묵묵히 제 도리를 다하는 자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다. 반면에 받아들이는 양상이나 태도가 가히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며느리의 메가톤급 보복성 냉기류는, 이미 각오 한 바가 있었던 터이므로 다 내 잘못이려니, 당연히 누르고 무던하게 인내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명절 같은 때는 혼자 왔다, 혼자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중간에

" 아들아, 엄마가 니 안사람을 야단치려는 게 아니라 사돈댁에도 그렇고, 내가

두루 사과하고 싶어 그런다. 늬들 집 전화번호, 엄마가 좀 알면 안 되겠냐"

어미 말에 잠자코 제 구두코만 내려다보고 갈등하는 자식을 보면서,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리 염려가 깊을까, 싶어 가슴이 따가웠다. 그러기에 사정하고 설득해서 겨우 전화번호를 얻어내긴 했었으나 몇 날을 두고 통화를 시도해 봤지만 불발로 끝나는 바람에 결국 그 짓을 그만 두고 말았다. 오죽하면 제 동생한테 조차도, 마치 정보가 새나가면 조직이 와해될까 보안이 철통같은 첩보조직 마냥, 제집 주소를 함구한다는 큰놈의 의중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더 이상 조르거나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실인즉 이제 와서 내가 어른입네, 도리를 주장하고 종용하려는 게 아니라, 알고 보면 큰 아이(며느리)가 입은 상처와 다르지 않은 응어리가 내게도 있다는 동병상련에서, 그 참담함이나 모멸감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제나마 다친 마음을 조금이라도 만져주고 싶은 내 인간적 의지일 뿐인데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지금 와서 병 주고 약 주려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가증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싶어, 그만 막설(莫說)하였다.

기실, 우리의 문제를 엄밀히 따지자면 잘했다 잘못했다 이전에, 신념과 가치관에 의해 빚어진 결과라고 보지만 어찌됐든 기왕에 작심한 일, 흠이 있으면 뜯어고치고 잘못한 게 있으면 어른도 먼저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결심하고, 큰 애(맏며느리)한테 사과문을 써야겠다고 작심하였다. 다만, 정서적인 안정이 요구된다는 측면에서, 심리적으로 부담이 없는 유언장부터 먼저 작성키로 하였다. 유언장에 대해선 평소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주장해온 바 있었고 그것을 다만 문서화 하는데 의의를 두는 것이므로 갈등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을 수가 있었다.

6. 유 언 장(遺言狀)

성 명 : 0 智 洙

주민번호: 500-

혈 형 : O blood

내용

위에 적은 본인은 사리 판단이 온전하고 심신이 건강하고 맑을 때, 자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부탁을 문자로 남기는 것이니 성실하게 이행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곡하다. 살다가 만약 어미가 위급한 지경에 처해서 사경을 헤매게 되거든 자식들은 병원 내의 원목에게 임종기도를 부탁하고, 절대 생명연장을 위한 각종 의료기기들을 주렁주렁 매다는 수모를 겪지 않게 배려해다오.

평소에 어미가 주장해온 대로, 안구와 피부를 포함한 신체의 각 장기들은 그나마 실낱같은 명이나마 붙어있을 때 기증하는 편이, 재활용하는 데 있어 더욱 바람직한 처사라면 마땅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촌분도 주저 말고 동의하기 바란다.

어미의 소원이니 부디 명심하고 그리 되게 해주렴.

관련한 제반 문제들은 어미를 돌보신 의사 선생님과 의논토록 하면 아마도 무난하게 해결이 될 것으로 믿는다. 자식의 입장에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미를 뉘어놓고 생명 연장술은 커녕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하면 가엾고 딱해서 그 곤란지경을 다소나마 면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싶은 어미의 배려가 이 유언장의 목적임을 유념하면 좋겠구나. 선한 목적을 위한 일이니 염려치 말고 지체 없이 담당의와 상의하여 병원에서 진행하는 대로 감수하고 따라주기 바란다.

시급히 장기가 필요한 대기 환자 수에 비해, 기증하겠다는 제공자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신문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크게 느낀바 있어 작정한 일이니라.

어차피 진토로 돌아갈 주검인 것을, 가령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이 해당 장기만 이식하면 잘 살 수 있는데 기증자가 없어 목숨이 풍전등화 같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고 애석한 노릇이겠느냐. 좁게는 그 부모와 환자 본인이 절통(切痛)한 일이려니와, 크고 넓게는 그가 나중에 장성한 뒤, 어떤 인재로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재목일지 따져보면 청년을 잃는 일이란, 그 부모에겐 자식을 잃는 원통함이고, 국가적으로는 분명 커다란 인재 손실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망설일 이유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므로 어미의 소망대로 이행해다오.

세상에 와서 70년, 당장 지구촌을 떠난다 해도 일점, 여한 없는 생을 살았다.

마지막 당부는 재활용 하고 남은 신체의 부스러기들은 마땅히 화장을 하고, 남은 재 있거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누워계신 선산 소나무 밑이나, 자네들이 자주 다니는 등산길 어느 한 나무 밑에 거름이나 되게 묻어주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 될 것일세. 산사람도 소유하기 어려운 명당을, 아무 공로 없는 영장인 내가 차지하는 일은 의미 없고 스스로도 민망하니 무덤은 만들지 말거라. 명심할 일이다.

사랑하는 아들들, 그리고 내 졸병들아!

착하고, 어진 인성의 자식들로 인해 난 참 행복한 사람이었노라, 자부하고 살았다.

선물 같았던 삶, 세상으로부터 받기만 한 생이었으므로 이제는 내가 그 빚을 내 방식대로 일부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믿으니 어미의 원을 이룰 수 있도록 자네들이 성심 것 도와주실 것을 당부하네.

효성이 지극한 자식들이니 어미가 남긴 말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낭패한 심정일까만 그대로 두면 썩어 없어질 폐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적시(適時),적소(適所)에 재배치하는 것으로써 재활용할 수 있다면 혜택을 받는 사람은 물론, 너희들도 못난 어미가 누군가의 생명연장에 기여하고, 거창하게는 인류를 위하는 일에 일조했단 사실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자식들한테 늘 독재자처럼 굴었던 일들이, 생의 마감을 준비하려드는 지금에서야 어이 이다지도 구구절절 가슴이 에이는지... 너희를 한 번이라도 더 가슴에 안아 키우지 못한 아쉬움이 새삼스레 이리도 통한에 젖게 만드는구나.

이후에 후생 하여 만약 다시 한 번 이런 인연, 이런 관계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때는 하늘 아래, 땅위에서 둘 없는 어미가 되도록 내, 굳건히 약속함세.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안 바꿀, 내 사랑하는 졸병들아!

너희들 모두를 사랑해!... 사랑해 !... 정말정말 사랑해!

죽음이란 삶의 영역이 바뀌는 것일 따름이니 슬퍼도 너무 많이 울진 말고,

그 날은 조금만, 아주 조금만 울기다 알았지?

2018년 5월7일. 못난 어미가 썼다.

그렇게 벼르던 일 하나를 해치웠다는 홀가분함으로 이미 써놓은 문장을 들여다 보면서 유언장을 이렇게 써도 될랑가? 하고 혼자 웃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맏며느리인 민정이 한테 보낼 사과문인데, 어떻게 해야 그 애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 납득할 수 있게 쓸까, 부담부터 앞섰다. 하지만

'길마 무겁다고 소 드러누울까'.

칼을 뽑았으면 휘두르는 시늉이라도 한번 하고 볼 일이었다.

7. 편지 (천기누설)

민정아 !

고락(苦樂)없는 인생이 있을까마는 옛말에 ' 병이 같으면 서로 연민하고,

근심이 같으면 서로 구한다'고 했다.

그동안 지독한 모멸감에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치 떨리는 수모로

처참한 심정이었겠느냐.

네 심사를 그릴 때마다 나 또한 참담한 심경에 기가 막힌다.

특히 사부인(査夫人)생각을 하면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매번 통렬한 심회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동통을 느낀단다. 하지만 상처를 받았다는 측면에선 너는 너대로, 나는 또 나대로 힘든 시간이었으므로 오늘 진솔하게 토로하는 내 얘길 순수하게 해량하고 포용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마음의 눈으로 너를 죽 지켜보면서 천생 옛날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곤 하였다.

모질지도 못하고 여려빠졌으면서 그리도 날을 세우는 까닭을 설마 내가 모른다고 생각진 말아다오. 어찌 정녕 모를 수가 있으리. 자식의 일인 것을...

명절이 지나갈 때마다 언덕에서 동구 밖 먼 곳을 바라보며, 안 올 줄 번연히 알면서도 행여나 이번 설엔 아이를 데리고 오려나, 아니면 추석 명절에는 늦게라도 찾아오려나, 내색은 안 했지만 건 듯 부는 바람소리에도 네 발자국 소린가, 귀를 나발만큼 열어놓고 기다리곤 했었단다.

사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는, 명절이면 특히나, 애기 데리고 너 혼자 외로웠을 생각에 짠한 마음이 고문 같아 말할 수 없이 불행하였다.

대체 널 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 나로선 알 수가 없는 일이라서 언제라도 너를 만나면 그립고 아쉬웠던 이야기들을 모두 하리라 잔뜩 벼르기만 했었는데, 마침 오늘을 기회로 삼았으니 모쪼록 가슴을 열어젖히고 들어주었으면 좋겠구나.

세상 하직하신 지가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내 시어머니께선 생전에 기회만

있으면 날보고 그러셨다.

"어멈아, 나 살아있는 동안에 늬들 혼례 날 좀 잡아보자꾸나.

네가 얼마나 사무쳤으면 마음을 그리도 굳게 닫아 걸었겠냐만

여자는 암만 애를 낳고 살아도 혼례 없이는 그대로 미성(未成)인 게야."

... 에혀, 정말이지 속 상허구나. "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겠지만 실인즉 난 사실혼 상태에서 자식 둘을 낳도록 그냥 살았다. 혼례식을 안 한 것에 무슨 까닭인들 없을 수가 있으리. 내심, 언제라도 수틀리면 관 둘 것이란 것과 내 행동에 후회 없이 책임 질 각오가 되어있었지.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어른은 날 회유하시느라 기회만 있으면 안타까워 그러셨다.

말수가 적은 가운데 이해가 깊으신 분이 위없이 어진 덕을 갖추신 데다 자식 사랑도 유별났기에 그 어른에 대해선 '쓿은쌀에 볕뉘'만한 서운함도 없었으나 그 권유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선 내 불효가 막심했다 싶어 돌아다 볼 적마다 맘 상하고 울고싶어진다. 내가 애초에 너희들 혼인을 반대한 까닭이 네 신분을 따져 그리된 것이지만 나는 양친 없이 자랐다는 것을 빌미로 시부모도 아닌, 시숙(媤叔)한테 인격적 수모를 당한 것에 발끈하여 어리석게도 오기를 부린 것이 내처 오늘에 이르고 말았구나.

내막을 모르는 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시절 내 이야기를 좀 해야 될까 보다.

당시 네 시부(媤父)는 현역 공군 중위로 오산 비행장에서 복무 중이던 때였고 난 서울 모처의 종합병원에서 간호보조원(지금의 간호조무사)으로 근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헌데 그날은 네 시부가 동대문구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중 함께 갔던 동기생이 급성 충수염으로 응급 상황에 처하게 되자 서둘러 찾아온 곳이 인근에 있는 우리병원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부지런히 날 찾아왔는데 사람이 워낙 온건해 보이는 데다, 나를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이라 크게 밉거나 싫지는 않더라구.

그래서 우호적으로 대할 수 있었지만 결혼상대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는데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그 가운데 있었지. 어느 날 병원으로 날 찾는 전화가 걸려온 거야.

" 누나 !, 김 시영(가명) 중위가 제 형인데요, 엄마가 새벽에 연탄 갈고 아침에

어지럽다고 못 일어나서 형한테 연락하니까,

누나한테 전화해서 좀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래요."

그러는데 어쩌겠어, 내과의한테 얘기하고 수액 1000cc 한 병 들고 가서 환자 손이랑 얼굴도 깨끗이 닦아드리고, 수액도 꽂아놓고, 내친김에 방안 정리도 좀 해 드리고 돌아왔지. 얼마 후에 병원으로 그의 모친이 날 찾아오셨더라구.

" 간호원 아가씨, 날 알아보겠수?"

" 아, 네에, 그럼요,.. 근데 몸이 아직도 개운치 않으신 거예요? "

" 아아니 그래서 온 게 아니라, 오늘은 내 작정하고 아가씰 좀 보고가려고 시영이

한테 물었지. 경황없어 그날은 치하도 못하고 인사가 빠졌수. "

" 무슨 말씀이세요,.. 근데 댁이 김포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장위동엔 어떻게?..."

" 그래요, 그게 막내 학교가 너무 멀어서 거기다 방을 하나 얻었는데, 글쎄 그날은 비가 오길래 연탄 갈고 부엌문 열어두는 걸 깜빡했다가 그 사단이 난 거라우

일부러 온 사람한테 경황이 없어 제대로 치하도 못하고...작정하고 오늘은 좀

보고 갈려고 왔지."

그러면서 들고 오신 과일 꾸러미를 건네 주시더라구. 그리곤

" 우리 시영이랑 친구라니까 잘 지냈으면 좋겠네, 내 자식이지만 착한 녀석이라우. "

그 모친이 돌아가신 뒤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에그머니나, 결과적으로 난, 내 발로 찾아가서 어른한테 선을 보이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 된 셈이더라구.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 무렵 네 시부(媤父)는 제주도 외곽지역에 있는 비행장으로

전속 특명이 났는데, 혼자 임지로 들어가 버리면 날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더군, 그런데 모친께서 마침,

" 얘, 그 간호원 아가씨, 네 배필로 생각해 봄직 하던데 늬들끼리 약속은 했니? "

하시니까 고무된 그가 그날 저녁 형이 있는 자리에서 내 얘길 꺼냈다더구나

그런데 형이 대번에

"부모도 없이 막자란(?) 여자, 무얼 믿고 우리 집안으로 들일 꺼냐 "

일축해 버리더란 거였다.

내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본가에서 부엌일을 도우는 아가씨가 어느 날 시모(媤母 의 심부름으로 내게 제사떡이랑 과일 꾸러미를 전하러 왔다가 돌아가면서 해준 말이었다.

" ...할머니가 큰아저씨 더러 아서라, 사람 국량을 재는 것이 그뿐이더냐, 다 제 할 탓이니라, 양친이 없으니 제 일신 단속을 더 잘했을 수도 있는데 함부로 막말은 하는 게 아니다, 그러셨어요... 언니 이말, 절대로 저한테 들었다고 하지 마세요."

듣고 보니 펄쩍 뛰게 괘씸하였다. 사전에 나한테는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자기들끼리

나를 두고 공기놀이 하듯 이러니저러니 했다는 자체가 심한 모욕으로 느껴졌었다.

어리고 순진한 이십대 처녀의 소가지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던 거야. 당했구나, 판단하면 기질적으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내 근성이 무상(無想)했을 리 만무였지. 그 말은 결과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을 부른 셈이었다.

상대를 적잖이 얕잡아 본 그 형의 교만이, 청류(淸流)로 자처하는 내 자존감을 박살내고 그 모멸감에 참척하여 마음의 문이 그만 쾅, 닫혀버리게 만들었거든.

그러한 감정은 잠깐 쏟아지고 지나가는 소나기나 산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니라, 이후로 내 개심(改心)을 기대하긴 글러버린 큰 사건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세상에 없는 부모를 욕보인 것이나 다름없는 데다, 우리 집안에 대한 멸시이기도 하단 사실에 분기탱천하였다. 평소 내 인생관 중엔 인간에게 가장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는 상대의 취약한 부분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 자라고 믿는 것인데 그런 내 촉을, 시숙 될 자가 건드린 셈이 된 거였지 뭐냐.

이미 알고 있겠지만 1970년도엔 시댁이 있는 지금의 김포시(市)가 아직 행정관청으로 읍(邑)이던 시절이었는데 훈이 한테는 백부(伯父)이시고, 나에겐 시숙인 그가 당시 그곳의 읍장(邑長)이었다. 관료로서의 그는, 신중하기론 돌다리도 두드릴만한 사람이었고 대내외적으로도 명망과 신뢰함직한 인격자로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긴 했었지.

여하튼 김 중위가(네 시부)주말 오후에 병원으로 날 찾아와서 그러더구나.

"지수씨, 이번에 나하고 같이 제주도 들어갑시다. 결혼도 하고...

고생 안 시킬께, 응? 그럽시다 ! "

"여보세요, 부모 없이 막자란 여자가 결혼은 무슨 ,.. "

내 삐딱한 대꾸에 흠칫하던 그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지

" 누가 막 자랐다고 그래요, 그건 형이 실언을 한 거지만 냉정하게 보면 형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이해 좀 해주면 안 돼요? "

" 거, 이해라는 걸 왜 나만 해야 되는 거죠? 그러구 일을 바로 잡고 싶으면 당신

형이란 사람이 먼저 사과해야 되는 게 순서일 것 같은데, 무슨 경우요?

원래 벼슬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서 세상 살아?

" 어허, 아가씨가 의외로 꼬였네, 깊고도 시원하게 툭 터진 사람으로 봤더니

아니었어요?"

그런데 웃기는 건 사뭇 진지하게 날 상대하는 그의 인간적인 대응을 보면서 내가 속으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더라는 거지.

몇 일후, 모친이 재차 병원으로 찾아 오셨더라구. 어른께서 당신 장남의 입장 표명을 하시느라 구구하게 날 달래는데 반분은 풀렸지만 병 주고 약 준다 싶으니까 한편으론 슬그머니 부아가 나더라구. 그래서 그랬지.

" 집안이 아직 건재하고 직계 어른이신 숙부님이 세분이나 계신데 제 맘대로 혼사를 결정지을 수 없는 일이라 상의토록 해 보겠습니다 "

기대와는 영 다른 반응이었던지 모친이 흠칫 놀라 한참을 잠자코 계시더만. 솔직히 그때 난 시숙한테 인격적으로 멸시를 당한 데 대한 보복적 분풀이를 하고 싶어 궁리 중이었거든. 나 참 못 됐지? ㅎㅎㅎ...

나중 결과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시모의 상심과 염려가 태산이었다. 자식 사랑이 그 정도로 유별난 어머니를 보는 것은 내심 감동적이더라. 당시의 제주도 시골은 척박하였고 생활환경이나 여건도 지금 같지 않았던 때라 아마도 아드님이 혼자 영외 거주하려면 불편할 것임을 염려해서, 자식을 위한 일에 모친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란 해석이 어렵지 않더구나.

어른이 다시 찾아와서 그리 간곡하신 데다 그 사람도 전전긍긍, 내 맘을 열기에 진력하는 것이 보이니까, 나중엔 (그래, 내가 뭐라고... ) 허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없으면 못 살겠다, 죽도록 사랑하는 맘은 아니더라도 딱히 싫어 죽겠다는 감정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 자신과 타협할 수 있더란 얘기야. 속셈으론 시숙에 대해, 손 안 대고 코푸는 형국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다는 영악한 계산도 한몫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민정아!

그런데 세상에, ... 세상에 말이다. 그 당시 시숙이 내게 한 짓이나 다를 바가 없는 짓거리를 내가 너한테 저질렀단 사실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전율을 느꼈다.

그 치 떨리는 모멸감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나마 내 진심으로 사과를 하마.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나의 오만을 용서해다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 말은 이날까지 네 속에서 끓고 있는 그 삭일 수 없는 분노로부터 그만 널 해방 시켜보렴. 아마도 그러면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치명적인 상처임을 알기에 위로삼아 일러주고 싶은 부탁인 셈이야. 이미 '흘러간 물로써 물레방아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더라도 분하거나 슬프거나, 지나간 일로 마음을 더 이상 상하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내 의지이니라.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네 시부의 임지인 제주도에 같이 들어가기로 합의를 한 다음 날, 김포 본가에 들러 공식적인 인사 겸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일자가 촉박하여 혼례식은 부득이 제대 후인 1년 뒤에 하기로 의논이 되었지. 어차피 시숙하고는 피차 마주하기가 불편한 사이라 맞부딪지 않으려고 극구 피했지.

그날 저녁 난 건넌방에서, 모친은 안방에서, 네 시아버지인 김 중위는 부친하고 사랑방에서 잤다. 낯선 환경에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랬겠지만 잠이 영 안 오길래 난 베개를 들고 슬그머니 모친 방으로 들어갔지. 인기척에 어른께서 얼른 불을 켜시더구나. " 왜 잠이 안 오냐? "

" 네 이방에서 자고 싶어서요 "

난 당신 옆에 모로 드러누우면서 그 어른 앞섶으로 가만히 손을 들이밀고 가슴을 더듬었지. 시어머니 되실 분이란 어려움이나 삼가 하는 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었거든. 따뜻하고 말랑한 젖무덤이 손안에 가득한 걸 느끼니까 그지없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뭐랄까, 마치 오랜 방랑 끝에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니면 긴 항해를 마치고 마침내 기항지(寄港地)에 닻을 내린 선박 같다고나 할까.

" 아이구 얘 망측허다 아서라, 간지럽다. "

" ... 딱 한번만 좀 만져 볼께요. "

그러는데 뇌리에 한가득 둥근 달 떠오르듯 어릴 적 내 할머니 생각이 나는 거야.

가슴에 손을 들이밀면 펄쩍 질색하면서도 못이긴 척 허락 하시던,.. 그건 필경 내 가슴 저 밑바닥의 무의식 세계에 죽은 듯이 엎드리고 있었던 적요한 그리움일 터였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 모친께서 그러시더구나.

" 얘, 시에미 젖만지는 며느리도 있다던? ... "

"....?...!!........."

"... 아매도 네가 에미 정이 그리웠던 게야... "

어이없게도 그 한 마디에 그만 눈물이 솟구치더라.(그랬었던가, 아, 그랬던 것일까...)

그 밤 이후로 시모는 알게 모르게 내게 힘을 실어주곤 하셨다. 흉을 봄직도 한 짓을 했건만 아무런 계산 없이 들이댄 그 진솔함이 모성을 자극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다음 날 우린 오산비행장 터미널에서 C-46 공군 수송기를 타고 네 시아버지 임지인 제주도로 날아갔다.

이제 와서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은, 나를 만날 때마다 당신의 장남을 의식하신 듯 " 얘, 가슴에 사무친 일들일랑 그만 잊어라 "

하시던 시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진다. 근데 정작 이젠 면사포를 한번 써볼까, 싶었을 즈음에 어른께서 돌아가셨지.

솔직히 젊은 날에는 누군가의 결혼 청첩장을 받으면 그걸 보면서 남몰래 울었는데 그것도 체념인지, 아님 면역이 된 건지 세월이 가면서 나중엔 아무런 감상도 일어나지 않고 무심해지더라. 의미가 없어졌거든. 이젠 아무시랑치도 않아.

민정아,!

돌아보니 나는 풍차 같은 사람이었다. 바람의 힘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풍차...

바람이 많은 언덕에 서서 진종일 바람을 기다리고, 바람을 맞고, 그 바람을 받으면 지체 없이 돌아가는 운명의 풍차... 그나마도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바람이 없으면 제 스스로는 제 몸도 어쩌지 못하는 그냥 하나의 바람개비인 게지.

내게 있어 시숙은 풍력을 일으킨 바람이었고, 나는 그 바람을 맞아 끊임없이 돌았던 풍차였던 거지 뭐냐.

이제사 그런 내가 보이는구나. '파도 위에 물거품' 같은 것이 유행가 가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니 정말 인생이란 게 그와 다르지 않은 것이더라구.

암튼 세세한 이야기는 이 다음에 우리 만나거든 그날 얼굴 마주보고 앉아서 못다 한 이야기들 나누어 보자꾸나.

내게 받은 상처일랑 하룻밤 꿈같이 잊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모질지도 못하고 풀잎처럼 여린 네 맘을 행여 내가 모른다고 생각진 말아라.

그런 널 이해하고 사랑해!

8. 겨울 끝자락에서

나는 지금 마음의 겨울을 지나가고 있다. 협곡의 고랑 물도 골짜기를 버린 뒤에야 바다에 이르듯이 365일, 어느 계절인들 매양 그대로 한 철만을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낙목한천에 잎 다 지고 맨몸이던 나뭇가지에도 연두 빛 새싹들이 속살속살 숲을 깨우는 기운이 돋아 오르고, 엄동에는 저- 만치 산 아래로 피한(避寒)했던 산새들도 이제 하나, 둘씩,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모진 바람이야 제멋에 겨운 것이려니 하지만 그 바람에 뿌리를 한 층 더 깊이 박은 나무들은 얼마안가 잎도 좋고 숲도 무성해져 성관(盛觀)이 자못 장엄하게 열릴 것이다.

먼 데 발자국 소리처럼 봄이 오는 기척이 들리기까지 참고 견뎌야하는 것들이 비단 나무들뿐이랴. 세파에 지친 우리네 인생도 이기고 인내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한 것을... 이제 봄볕 바른 화단에 함박꽃 자주색 잎이 활짝 벌어지기 시작하면 마당가 빨래 줄에 박새나 곤줄박이가 날아와 약눈이 콩 같이 까아만 눈을 반짝이며 봄볕을 즐길 것이다.

비온 뒤, 앞내를 달려가는 물소리 청량하고 뻐꾸기, 까투리, 목청을 돋우는 날이면 어느 한가한 주말 오후, 문득 창밖에서 꿈결인 듯, 거짓말처럼

"할머니이!..."

"어머니, 저희들 왔어요 ! "

그리운 그 목소리들이 들릴까...

나는 지금 혹독한 마음의 겨울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당선소감

옥정숙
옥정숙

원고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느라 마감일을 겨우 하루 앞두고서야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헌데 오늘 당선 소식을 받고 보니 보내기를 잘 했구나, 싶어 반가움이 배가합니다. 딴에는 노력하고 애썼던 만큼 시험대에 올려놓고 검증을 받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부추기며 용기를 내었던 일입니다.

무릇 세상에 있는 일치고 땀 흘리고 수고한 과정이 없는 일이 무엇이리오만 지금 보니 과연 글쓰기에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는가, 하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시니어 문학상' 공모 기사를 보고 애초에 의욕적으로 덤비기는 하였으나 막상 글쓰기 과정에서,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인지하고 내심 우려가 깊었습니다.

세상에 의지대로 되는 일이 뭐 그리 흔하기야 하겠습니까만 욕심만큼 써지지 않는 데서 갈등이 심했던 것이지요.

언제 스러질지 알 수 없는 저녁노을 같은 생의 황혼에, 그나마 붙들고 놀 수(?) 있는 것으로는 문학만한 장난감(?)도 없다싶어, 늦게 만난 아쉬움은 있을지라도 생의 가을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운인지요.

우열을 가리시느라 수고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당선 소식이 저한테는 천 마디 조언과 격려의 말씀이나 다름 아니어서 덕분에

즐겁고 행복합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희비의 순간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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