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새 귀경천향지풍<貴京賤鄕之風>은 안 된다

입력 2015-03-31 05:00:00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옛 역사서에는 옛 신라나 신라 수도 경주를 지칭하던 말로 '서나벌, 서벌, 사라, 사로, 서야벌' 등이 나온다. 이는 여러 단계의 음운 변화를 통해 '서울'이 됐다. 이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 명칭으로 등장한 지가 올해로 70년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이듬해 이뤄진 미 군정의 조치에 의해서다. 조선의 한양(漢陽)인 '한성'(漢城)이 일제 때 '경성'을 거쳐서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현 서울역사편찬원)가 2002~2004년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 역사'에 따르면 오늘의 '서울' 탄생 과정은 이렇다.

"해방 당시까지는 서울은 경성부(京城府)라는 이름의 지방행정 단위였다…미 군정은 1946년 8월 10일부터 효력을 발생하도록 한 '서울시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발표하여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하였다. 이 '서울시헌장'은 미국 주(州) 입법부에서 도시단체를 인정하고 권한과 조직을 정하는 '자유시헌장'을 본따 규정한 것이었다. 이어 같은 해 9월 18일 미군정 법령 제106호 '서울특별시의 설치'가 발포되어 서울시는 이제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도(道)와 같은 지위로 승격되었다. 이 법령의 발표일은 1946년 9월 28일이었으니 바로 서울특별시의 시대의 출발이었다."

이런 공식 명칭에 앞서 민간에서는 그전부터 서울 지명을 썼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한글판 독립신문은 주소지를 서울로, 별지 영문판은 'SEOUL'로 표기했다. 하여튼 미 군정으로 서울은 공식 수도 이름이 됐다. 게다가 '특별'이란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서울은 눈부신 팽창을 거듭하며 '특별함'을 더했다. 그런데 그 서울의 특별함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포식자(捕食者)의 도시가 된 것이다.

경기도에서 분리, 서울은 '도(道)와 같은 지위로 승격된' 것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70년 만에 '대한민국을 거느린 서울공화국'이 됐다. 경기도나 일부 수도권 지역을 빼면 나머지 시와 도는 한 언론학자의 지적처럼 서울의 '식민지'와 같다. 정부 부처 일부가 세종시로 분산했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70년 동안 서울의 특별함으로 지금 어떤 현상이 펼쳐지고 있는가? 지방에 대한 푸대접과 무관심, 그리고 이에 따른 국토의 기형적이고 심각한 불균형 발전이다.

지방의 국민은 국가정책의 고른 혜택을 받지 못해 정책의 영양실조와 기아에 허덕이거나 사형선고로 시한부 사형수의 삶과 같은 나날이다. 특히 희망을 잃고 일자리, 짝을 찾아 서울로 수도권으로 매일 떠나는 젊은이, 자식을 등 떠밀어 보내야 하는 부모들 심정은 그야말로 절망이다. 단지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푸대접받고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특별함을 누린다면 더 이상 '공화국 대한민국'이 아니다.

조선조 후기 들어 한때 한양의 글깨나 하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서울은 귀하고 시골은 천하다'는 '귀경천향지풍'(貴京賤鄕之風)이 형성됐다. 가진 자와 권력자, 배운 자들끼리 서로 뭉치고 자리와 권세, 부(富)를 나누고 도성 한양을 벗어나지 않고 도성 내 얽히고설켜 빽빽하게 모여 살려고 발버둥쳤다. 그리고 지방과 지방민들은 천하게 여겼다. 도성 부근을 지나는 지방 상인이나 백성들의 재물을 뺏거나 괴롭히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나라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차별받은 지방에서의 크고 작은 민란이 그치지 않았다.

물론 지방과 지방민 천대 현상은 조선 왕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조선은 민심의 이반에 시달렸고, 신라와 고려는 민란과 극심한 민심의 동요를 겪었다. 서울특별시 70년을 맞아 이제 미국이 던져준 서울특별시에서 '특별'(特別)이란 수식어 대신 단군 이념인 '홍익'(弘益)을 넣으면 어떨까. 비대한 서울과 빈약한 지방과의 간격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서울'지방 상생의 틀을 짤 때다. 서울과 지방에 고루 이익되게. '새로운 귀경천향지풍'은 안 된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