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 분수 지키며 외길 50년…누릴 것 다 누렸다면 여기까지 왔겠나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은 투박하다 못해 거칠었다. 손등 여기저기의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굵은 소나무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따스했다.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강원도 양양의 해발 800m가 넘는 산에서 베어온 것들이오. 같은 굵기라도 이렇게 험한 곳에서 자란 놈들이 훨씬 무겁고 나이도 많소. 척박한 땅에서 고생했으니까…. 아마 나보다 10배 가까이 더 살았을게요." 지름이 족히 두 자는 됨직한 황장목(黃腸木)에 대해 이야기하는 최기영(68) 대목장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비바람을 맞으며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를 다스려 다시 천 년을 이어갈 집을 짓는 이는 나무를 닮아 보였다.
◆전통 사찰에 밝아 대견사 중창 맡아
2일 비슬산 대견사 중창(重創) 현장에서 만난 최기영(68) 대목장은 스스로를 '최 목수'라고 짧게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전통 건축계의 거목 가운데 한 명이다. 궁궐'사찰 등 건축물의 설계와 시공'감리 등을 도맡아 책임지는 목수를 일컫는 대목장(大木匠'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보유자는 그를 포함해 3명뿐이다.
"대목장은 쉽게 말해 건축가요. 설계, 치목(治木'나무를 다듬고 손질함), 건설, 감리 등 나무로 집을 짓는 모든 과정을 총괄하니까. 기둥, 보,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 같은 집의 구조는 물론 창이나 마루, 문짝, 기와 등 다른 직종도 꿰뚫고 있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니지. 나도 목수 일 대충 안다 싶어지니 나이가 이제 칠십이야. '철 들면 죽는다'는 옛말이 맞는 것 같지 않소? 허허허."
대목장은 2010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지역적, 민족적 특수성을 뛰어넘어 전 인류가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이 된 셈이다.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판소리, 처용무 등 모두 11건의 인류 무형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8월 대목장으로 지정된 최 대목장은 목조건물 중에서도 전통 사찰에 특히 밝다. 영주 부석사, 정읍 내장사, 공주 마곡사, 강화 보문사 등 이름난 대찰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새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신라 고찰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의 기를 누른다는 이유로 강제 폐사된 대견사 중창도 그에게 맡겨졌다.
"와서 보니 절터가 너무 좋더라고. 대한민국 안 가본 데 없이 다녀봤지만 정말 훌륭한 자리야. 그래서 여기에는 외국산 나무는 하나도 쓰지 않기로 했소. 대들보도 봉정사 극락전 보수 때는 45㎝짜리를 썼는데 여기 대웅전에는 60㎝짜리요. 기둥 가운데 붉은색이 도는 것은 명품으로 꼽히는 적송이고."
14일 상량식을 갖는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보각국사 일연 스님이 22년간 주석, 참선에 몰두하면서 삼국유사 집필 구상을 했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는 사업비 50억원 전액을 부담하며, 내년 3월 공사가 마무리되면 개산식을 열 예정이다.
공사 현장을 둘러보던 동화사 주지 성문 스님은 "대견사가 새로 지어지면 대구 남북을 비파(琵琶)의 줄이 잇게 돼 지역에 새로운 기운이 넘쳐날 것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다"며 "대견사 중창은 문화'역사와 민족정기를 복원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김문오 달성군수는 "대견사는 대구테크노폴리스의 최첨단 과학기술, 낙동강의 수변 경관, 비슬산의 참꽃 축제 등과 연계한 영남의 관광'문화'예술의 거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대목장의 '끼'
충남 예산이 고향인 그는 16살 때인 1961년 목수 일을 처음 배웠다. 스승은 당대의 도편수(都邊首'궁궐이나 사찰 같은 전통 건축의 총책임자)로 꼽혔던 김덕희'중희 씨 형제였다. 고향 가까이에 있던 수덕사의 완전 해체 수리 공사가 인연의 시작이었다.
"두 분은 경북 문경 출신이신데다 일제 말기에 이뤄졌던 수덕사 수리를 맡는 바람에 예산으로 이사오셨더랬소. 당시 도편수 대목장을 뽑는데 국내 목수 가운데 김덕희 선생님이 1등으로 뽑히셨거든. 나는 초등학교 마치고 난 뒤 이것저것 해보다 스님이나 될까 하고 있었는데 집 짓는 걸 보니까 너무 멋있더라고. 게다가 밥 먹여주고 잠 재워준다니 얼마나 좋아!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이 일 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야. 다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지."
뭔가 낭만적이거나 교훈이 될 만한 대답을 기대하며 던졌던 질문은 무위로 끝났다. 하지만 솔직한 대답 속에는 그가 대목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함께 들어 있었다.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셨다고 합디다. 할아버지도 그러하시고. 한마디로 내게도 '끼'가 있었던 것이지. 손재주도 좀 있었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소. 하다 보니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이 게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일했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타고난 복도 없는 사람이 남들처럼 잠 다 자고 어떻게 성공하겠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것이지."
그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대목장의 지위가 상당했다고 한다. 장인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궁궐, 사찰, 가옥이 모두 목조건물이다 보니 '목수 중의 목수'인 대목장에게는 상당한 벼슬이 주어졌다. 세종 때 숭례문 재건 사업을 총괄한 대목장은 중인 신분으로 정5품 이상의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대목장은 철저하게 도제식으로 계승됐다. 나름의 기문(技門'기술로 만들어진 가문)도 형성돼 있다. 이를테면 최 대목장과 전흥수 대목장은 김덕희'중희 도편수의 맥을 이었고, 화재로 소실됐던 숭례문 복원의 도편수를 맡았던 신응수 대목장은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기문을 계승했다. 당연히 그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숭례문 복원에 대해 욕심이 있었을 법했다.
"사실 우리 집안 중시조가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를 지내면서 숭례문 축조를 지휘했던 최유경(崔有慶) 선생이오. 나도 숭례문 불타는 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가슴이 무너져내렸소. 하지만 숭례문을 과거에도 만졌던 기문의 신응수 대목장이 책임지고 일하는 게 맞다고 봤소. 그 게 역사적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한 거요. 우리 쪽은 사찰을 많이 했고 신 대목장 쪽은 궁궐에 강점이 많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물론 우리 쪽에서도 기와장, 단청장, 조각장 등이 참여해서 힘을 보탰고."
◆배움의 열린 자세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대목장 전수교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후학을 양성해야 전통 건축의 맥을 이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그는 수십 명의 이수자를 두고 있다. 대견사 중창 현장에는 김종양 씨가 상주하고 있다. 최 대목장의 아들도 의대를 졸업했지만 아버지의 길을 뒤 따라가고 있다.
"대목장은 인성이 좋아야 해요. 기술만 있어서는 되는 일이 아닌 게지. 사법고시 합격보다 몇 배는 힘들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야. 그래서 옛말에 '도편수는 정승 감이 돼야 한다'고 했소. 참된 스승 밑에서 본인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흔 넘어서 실직한 뒤 목수 일 배우겠다고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항상 마음이 아파.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거든."
최 대목장은 어떤 사람으로 후세에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기능인으로서 반듯한 양심을 갖고 산 사람'으로만 알아줬으면 한다고 답했다. 중요무형문화재, 대학 석좌교수,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상임 고문 등 번드르르한 직함들을 젖혀두고 자신을 '최 목수'로만 소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목수라는 업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도 함께 느껴졌다.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해요. 목수는 목수일 뿐이야.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이나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고 따라한다면 대목장의 분수 즉, 그 꼴값에 맞지 않는 것이지. 목수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오직 그 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아직도 어린 제자의 일하는 모습에서 배울 게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익혀요. 내가 목수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스스로를 낮출 줄 알아야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전통 건축에 평생을 바친 대가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후회되는 일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제일 아픈 곳을 찌른다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다름 아닌 가족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마침 최 대목장의 아내, 김금희(67)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물려받은 것 하나 없이 오로지 기술 하나만 배워 자수성가하려면 사람 노릇 제대로 못 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알콩달콩 사는 재미까지 누렸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요. 그래서 요즘에는 집사람한테 큰소리는 절대 못 친다오. 그냥 잔머리 안 굴리고 진심으로 대하면서 살아왔을 뿐이지. 애들이 삐뚤지 않게 키워준 것만 해도 고마울 뿐이오."
한옥에 대해서 한마디만 해달라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대학생들에게 자주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중에 결혼하면 한옥에서 애를 낳아야 애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면 다들 재미있어하더라고. 한옥에 쓰이는 소나무, 흙, 돌, 기와, 창호지는 모두 자연에서 왔지 않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지. 공기는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 정화되는 게 한옥이오. 태교가 따로 필요 없다는 말이오. 세상 사는 이치는 다 똑같아. 사는 방식만 제각각인 것이지. 이건 50년 목수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돼."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최기영=1945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현재 ㈜삼보특수목재 대표이사,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총연합회 회장, 전북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1977년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 수리기능자 자격을 인정받은 뒤 2000년 대목장 보유자가 됐다. 경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월정교 복원사업도 맡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월성 남쪽 궁성의 통로인 월정교는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돼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1천300년 전의 백제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도 그의 작품이다. 2004년 옥관문화훈장, 2010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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