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교재 손수 장만, 수업 지루할땐 동화구연
70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가 유치원생을 가르친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최태수(73'대구시 북구 동변동 유니버시아드 선수촌 1단지) 씨를 만났다. 나이 들면 구닥다리일 거라는 생각, 그는 보기 좋게 한 방 먹이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음은 수업 자료였다. 컬러풀한 컴퓨터 작업에 다양한 동영상, 한자 쓰기 그래픽까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만든 교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2002년 대구 매천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퇴직한 최태수 씨.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산다. 월화목금에는 유치원에서 한자 강의를 하고 주말에는 주례를 서고 주례 없는 날에는 짬짬이 산행을 하고 모처럼 쉬는 수요일에는 각종 모임에 나가고….
"제 자랑 같지만 이런저런 모임에서 모두들 회장으로 추대합니다. 심지어 종친회 회장도 맡고 있습니다. 고맙지만 너무 바빠요." 살짝 엄살 겸 자랑을 잊지 않는 최 씨는 어디를 가도 누구나 반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유가 아주 궁금했다.
-모두들 좋아하고 대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학교나 유치원에 강의를 가면 깍듯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90도로 인사를 하니 모두들 일어나 자연스럽게 답한다. 나이 들수록 '내가 누군데, 내가 나이가 많은데'라는 생각을 버리고 예의를 갖추면 모두들 대접한다. 관계가 좋아진다는 이야기다.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나를 낮추고 욕심을 버리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나를 낮추면 내가 올라가는 이치다."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하하 그런가.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을 좋아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이치와 순리에 따라 흘러가면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장애물을 만나면 이기려 하지 않고 에두른다. 이렇게 집 사람 얼굴 사진을 휴대폰 고리에 달고 다닌다. 아내가 그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다는 거 해주면 된다. 이것도 어려운가."(웃음)
-즐겁게 사는 비결이라도 있나.
"일단 집을 나서면 집안일을 잊는다. 웃고 농담한다. 걱정을 얼굴에 달고 다녀봐야 해결되는 게 없지 않은가. 살아가며 지키려 하는 세 가지가 있다. 소식(小食) 심안(心安) 다동(多動)이다. 적게 먹고 마음 편하게 가지며 많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퇴직하고 바로 유치원 강의를 시작했나.
"은퇴 후 3년 동안 아내와 같이 세상 구경을 다녔다. 동남아에서부터 시작해 유럽 아프리카 인도 네팔 등 유명하다는 곳은 거의 다 가보았다. 2005년이 되자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퇴직한 교사들을 중심으로 '청소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초대회장이 되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해 달라.
"2005년 퇴직교사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단체다. 어려운 초등학생을 위해 만든 모임으로 첫 번째 한 일이 어린이날 놀러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 학교에 한 명씩 추천받아 아침에 버스를 대절해서 부산으로 놀러 갔다. 해양국립수산과학관에 가서 바다체험을 했다. 좋아하더라. 이것을 보고 일반 아동들을 위해 수련활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체험 및 수련활동으로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고령 향토문화학교도 그런 취지에서 만들어지게 됐나.
"체험학습에 대한 반응이 좋아지자 자체 수련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연히 고령 월막초등학교 폐교 소식을 듣고 입찰에 참여하게 됐다. 고령 향토문화학교는 2008년 그렇게 만들어졌다. 고령은 왕릉전시관과 가야박물관 우륵박물관 암각화도 있어서 체험할 수 있는 여건이 아주 좋았다. 5월에는 고령딸기 체험도 했다."
-회장직을 그만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2008년 중앙도서관에서 '금빛평생봉사단'을 모집했다. 퇴직자들이 복지관이나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니며 교육하는 봉사단체다. 아이들에게 한자 공부와 예절 교육을 가르치니 정말 재미있었다. 또 북구시니어클럽이 생기면서 방과 후 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이것도 하고 싶어 결국 회장직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유치원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힘들 것 같다.
"아이들은 오랜 시간 집중하기 어렵다. 처음 5분 동안은 게임하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 풀기를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영상 등을 준비해 한자 교육을 하면서 중간 중간에 동화구연을 통해 집중력을 유지시킨다. 직접 만든 교재로 동화구연을 하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처음에는 할아버지 강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학부모들도 이젠 아주 만족해하는 걸로 알고 있다."
-강의도 많이 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강의가 있나.
"소년원에서 했던 강의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200명이 모였다. 잔뜩 굳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노래와 게임을 하며 분위기를 풀어나갔다. 인생을 이야기하며 여러분들은 '순간적인 죄인일 뿐 영원한 죄인이 아니다'고 하자 모두들 얼굴이 편안해졌다. 강의가 끝날 때쯤 소년원생 전부가 악수를 청하며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육의 힘을 느꼈다. 이런 게 교사의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주례도 본다는데.
"초등학교 교사를 40년 가까이 하면서 그 절반 정도를 6학년 담임을 했다. 아이들에게 '여러분이 혼인하면 주례를 서주겠다'고 약속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주례를 하기 위해 퇴직 후 별도의 공부를 했다. 이제는 제자들의 아들딸 주례를 하고 있다."
-가정교육에는 어려움이 없었겠다.
"나는 큰집 종손이다. 그런데 손자는 없고 손녀만 4명이다. 손자를 보기 원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자식의 뜻을 존중해 손자 꿈을 접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을 하도록 하면 된다. 집에서도 집안일을 많이 한다. 솔선수범이다. 지금도 집 청소는 내 차지다. 밥도 아주 잘한다."
-앞으로 계획은.
"유치원 강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하고 싶다. 교육의 꽃인 교장도 했고 각종 모임의 회장이라는 회장은 거의 다 해보았다. 이만하면 멋지게 산 것 아닌가. 더 바랄 게 없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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