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희귀난치성 질환 '말판 증후군' 앓는 박재영 군

입력 2010-10-20 10:45:05

"양반다리 못해도 컴퓨터 전문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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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난치성 질환인 '말판 증후군'을 앓고 있는 박재영 군은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지만 컴퓨터 전문가가 되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박재영(가명·13·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군은 양반다리 자세로 앉는 것이 버겁다. 희귀난치성 질환인 '말판 증후군'을 앓고 있어 척추가 심하게 굽었기 때문이다.

꿇어 앉는 게 편하다는 재영이는 키가 182㎝ 넘는 장신이다. 큰 키에도 46㎏에 불과한 깡마른 몸매, 가늘고 긴 손가락은 재영이의 상태를 짐작케 하지만 스스로는 환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재영이가 생각하는 자신은 다른 친구들보다 '키가 조금 크고 마른' 중학생일 뿐이다.

◆키가 쑥쑥 자란 이유

재영이는 어릴 때부터 약골이었다. 재영이의 어머니 홍미희(가명·40) 씨는 지난해 5월 아들의 운동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재영이가 달릴 순서였지만 보이지 않자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갑자기 쓰러져서 양호실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이 쓰러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운동회 이후 평소 심장이 좋지 않던 재영이가 걱정돼 대학병원을 찾았다. 의사들은 키가 크고 손가락이 가느다란 재영이를 보더니 어려운 용어를 주고 받았다. 어머니는 그때 재영이가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재영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다. 1년에 15㎝씩 쑥쑥 자랐고 손가락, 발가락도 엄마 아빠보다 훨씬 길었다. 초등학교 시절 뒷자리는 늘 재영이 차지였다. 어머니는 잘 먹이지도 못했는데 빠르게 자라는 아들을 조금 염려했을 뿐 큰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영이가 걸린 말판 증후군은 '거미 손가락증'이라고도 불린다. 말판 증후군은 염색체 이상으로 골격계와 안구, 순환계 장애를 나타내는 병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길게 뻗어 자라고 키가 큰 것이 특징이다. 농구선수 한기범 씨가 앓고 있는 바로 그 병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병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

미희 씨는 "재영이가 IMF 때 태어났는데 그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든다"며 가슴을 쳤다.

◆아버지를 울린 세상

재영이 아버지 박성철(가명·44) 씨는 250번 시외버스를 몬다. 250번 버스는 달성군 다사와 경북 성주, 칠곡군 왜관읍을 돈다. 대구를 벗어나 운전하는 성철 씨는 3일에 한 번씩만 집에 올 수 있다. 새벽부터 공기를 가르며 운전대를 잡는 아버지는 올해 대학에 들어간 큰 딸 미주(가명·19)와 재영이, 그리고 막내딸 혜주(가명·9)를 생각하며 버스를 몬다.

세상은 열심히 사는 사람의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성철 씨 가정에는 그랬다. 성철 씨는 5년 전에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담보로 2천만원을 대출받아 레미콘 차량을 샀다. 들쭉날쭉한 월급을 손에 쥐는 막노동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경유값이 ℓ당 1천800원으로 치솟았던 2008년, 성철 씨가 속해있던 레미콘 회사는 부도가 났다.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구조조정'은 성철 씨를 또 다시 직장에서 밀어냈다.

잔인한 세상은 아버지를 울게 만들었다. 아내 앞에서, 노력을 배반하는 세상이 미웠던 성철 씨는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미희 씨는 "그때 남편이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했다. 다행히 지난해 4월 시외버스 회사에 취직한 아버지는 한달에 150만원 정도를 번다. 열심히 살아도 가난은 이들 가정을 계속 짓눌렀다. 지난 5월 대출이자 400만원을 못갚아 남편은 신용불량자가 됐다. 은행에 담보로 잡힌 아파트를 뒤로 하고 지난해 미희 씨 가족은 보증금이 없는 지금의 월세방으로 옮겼다. 보증금과 월세를 내지 않는 대가로 미희 씨는 주인집 식당에서 일을 한다.

재영이네는 지난해 5월부터 석 달간 기초생활수급자로 보호를 받다가 아버지가 재취업을 하면서 수급자 탈락 통보를 받았다. 아내는 식당에서, 남편이 시외버스 운전을 하며 5인가족 기준 최저생계비 161만5천263만원을 넘게 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희 씨가 건강하다는 것도 수급자 탈락 원인이 됐다.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는 아들과 은행에 넘어간 아파트는 감안하지 않고 서류만 보고 매몰차게 수급자에서 탈락시키는 현실에 미희 씨는 못내 억울하다.

◆그래도 꿈꾸는 아이

재영이 가슴은 S자로 튀어나와 있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안과, 흉부외과 등 여러 과에서 진료를 받는 것은 합병증을 우려해서다. 말판 증후군은 합병증을 동반할 위험이 크다. 문제는 신체 발달 속도 만큼 내장 기관이 빨리 자라지 않아 혈관이 늘어나고 약해진다. 재영이가 심장이 좋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재영이의 담당 의사는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고 언제 어떤 병이 생길지 모르는 무서운 질환"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재영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농구만 하면 제가 1등인데요 뭐. 키가 커서 친구들이 던져주는 공을 던지기만 하면 다 들어가요"라고 말하는 재영이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오빠는 키가 커서 양반다리 못해요"라고 놀리는 여동생 혜주도 마찬가지다. 오빠가 앓고 있는 질환이 '키를 쑥쑥 자라게 해주는 병' 정도라고만 여길 뿐다.

그래도 재영이는 여전히 꿈을 꾼다. 벌써 진로도 설정했다. "'DELL'에 들어가서 컴퓨터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외치는 재영이는 지원 회사까지 정했다. 아픈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재영이의 꿈, 그 어떤 병도 꿈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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