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귀여움에 속지말자! 분뇨 악취, 코 마비될 뻔!
세 번째 구간인 피터만 아일랜드를 가는 날. 보트를 타고 가는데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켜 버릴 것 같은 거친 파도와 하늘 그리고 검은색 바다빛까지 덤으로 우리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진한 액땜을 하고 왔다고 여기며 '설마 무슨 일 생기겠어' 하는 오기가 있었다.
남극에 오기 전 송경태 씨와 나는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다. 촬영 때문에 내 차로 송 씨를 전주에서 태우고 부산까지 가는데 너무 피곤했는지 순간 잠이 들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자동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오른쪽으로 약 30도 정도 기울어진 상태로 '통통' 거리며 옆차선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갓길에 차를 정차시키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확인해 보니 이상하게 자동차에 흠집 하나 없었다. 뒤따라오던 자동차들과의 거리가 넉넉했기에 2차 사고도 없었다. 천운도 이런 천운이 없다.
한국에서 죽을 뻔한 액땜을 하고 난 터라 두려움은 없었다. 피터만 아일랜드에 상륙하니 본격적으로 눈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남극의 '블리자드' 현상이 나타났다. 블리자드는 일종의 눈폭풍이다. 대회가 열리는 이곳 남극의 여름 날씨는 낮기온이 영상 5℃로 올라갈 정도로 따뜻하다. 하지만 눈을 동반한 강력한 블리자드가 한번 몰아치면 순식간에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져 버린다. 2007년 대회에서도 2번의 블리자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첫째 날 펭귄들의 천국인 'Aitcho Island'를 달릴 때였다. 전반적으로 언덕이 많었던 코스는 해가 뜨면서 선명한 에메랄드색의 주변 빙산들을 보여주며 남극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 줬다. 쾌청하고 밝은 햇살 아래 하얀 눈밭을 뛰어다녔는데 펭귄들과 함께 달리는 낭만은 배고픔을 잊게 만들어 주는 보충제 역할을 했다.
그럭저럭 하루 레이스를 마치는 긴장이 풀릴 무렵 갑자기 차갑고 강한 바람이 우리 주위를 감쌌다. 말로만 듣던 블리자드가 우리를 덮친 것이다. 세상을 날려 버릴듯한 기세로 불어오는 눈을 동반한 바람은 순식간에 모든 사물들을 얼어버리게 만든다. 급하게 방한복을 배낭에서 꺼내 입는 그 짧은 시간이 왜 그리 길게만 느껴지던지. 살을 도려낼 것 같은 추위에 모든 감각이 마비됐다.
그리고 대회 마지막 날 'Deception Island'에서 우리가 돌아가는 걸 시샘하듯 처음보다 더욱 강력한 블리자드가 덮쳤는데 고무보트가 배에 접근을 못할 정도로 파도가 거세게 요동쳤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거센 눈바람에 달리기도 어려웠다. 남극에 간다면 블리자드를 한 번 만나봐야 추억에 남을 듯 하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추위도 지나고 나면 다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한 가지 더 신선한 경험을 추가했다. 시각장애인 도우미를 하다 보니 좋을 길을 찾기 위해 고글을 벗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 결과 대회 종료 후 이틀간 눈이 안 보이는 후유증으로 큰 고생을 했다. 남극에서 도우미를 또 했다가는 정말 시력을 잃을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까지 엄습했다.
남극은 어디를 가나 펭귄이 가득 넘쳐나는데 피터만 아일랜드도 역시 펭귄이 많았다. 펭귄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지만 곧 시간이 지나면 펭귄들이 사람을 구경하러 몰려 나온다. 남극에서는 야생동물 보호를 위해서 최소 5m 간격을 유지하라는 교육을 받는다. 야생동물이 앞을 가로 막으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한다.
펭귄은 처음 보면 너무나 귀엽고 예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지독한 분뇨냄새로 인해 이미지가 점점 변하게 된다. 또한 남극은 청정지역이라 인체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을 모두 회수해야 한다. 소변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대변은 꼭 비닐봉지에 담아와야 한다. 2007년 대회 때 한국팀의 어느 한 분이 정말로 비닐에 묵직한 것 한 마리를 잡아온 걸 보기도 했다. 노상방뇨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몰래 숨어서 해결했다. 방출의 기쁨과 양심은 공존하는 법. 인류에 커다란 죄를 지은것 같은 기분이다.
남극레이스를 위해 남의 장비를 착용해 줄 때 가장 많은 손작업이 필요한 것은 신발에 눈이 안 들어가게 만드는 게이터(각반)를 부착할 때다. 장갑을 끼면 손의 감각이 떨어지기에 원활한 작업이 안된다. 그래서 항상 맨손으로 하게 되는데 추운 상황에서 몇 분간 일하다 보면 손이 금새 얼어버려서 정작 내 장비를 착용할 때 어려움이 많이 생긴다.
레이스 중에는 누구든지 제한된 물과 음식만 가지고 달려야 하는데, 우리는 '잘 먹자'라는 목표로 배낭을 온갖 먹을거리로 채웠다. 레이스가 후반부로 넘어갈 때, 1등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딘이 달려왔다. 딘은 '울트라맨'이라는 책의 저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런데 물이 부족했는지 길가의 눈을 먹고 있는것 아닌가? "딘, 여기 물 있으니 마셔." "오! 고마워." 저쪽에서 2등으로 달리던 남아공의 폴도 다가온다. 이렇게 하나 둘 모여 간식파티가 펼쳐진다. 주최는 한국팀 유지성 선수.
사실 대회 중에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 특히나 기록에 민감한 선두권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극한의 조건에서는 인간인지라 도움의 손길이 있으면 누구나 손을 내밀게 된다. 하지만 음식을 나눌때는 원칙이 있다. 절대로 누구누구를 가려서 주면 안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먹을 것을 많이 준비해서 인심이나 쓰고 모두를 즐겁게 만들자는 나의 작전은 맞아 떨어져 코스에서 우리를 만나면 모두가 기뻐하며 환호를 보낸다. 실력이 안 되면 인간성이라도 좋아 보여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남극에서 아름다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마지막 구간인 '도리안 베이'는 이제까지 거쳐본 코스 중에서 최고의 코스였다. 부드러운 여성의 라인을 연상시키는 불륨감 있는 언덕들과 솜사탕 같이 포근하고 달콤한 눈발은 아무리 넘어져도 절대로 다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온통 백색의 세상에 한 무리의 전사들이 줄을 지어서 달리는 모습을 보니 너무 아름답다. 누구는 명예, 누구는 즐거운 인생 등 저마다 목적과 생각은 달라도 우리는 신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 남극을 택했다. 이곳에서는 나이, 직업, 학력, 재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고 살아남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원초적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것이 오지레이스의 살아있는 매력인지 모르겠다. 자아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레이스에 도전하고 또 도전할 것이다.
※포 데저트 레이스 시리즈 (4 Deserts Race Series)
미국의 오지레이스 전문 기획사인 레이싱더플래닛(Racing The Planet)에서 최초로 만든 전 세계 사막 레이스 시리즈 투어다. 이 시리즈는 오지 레이스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도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집트의 사하라 레이스, 중국의 고비사막 레이스, 칠레의 아타카마사막 레이스, 마지막으로 남극 레이스를 완주해야 한다. 4개의 대회를 완주하면 사막레이스 그랜드슬래머의 자격이 주어지며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총 41명만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한국에서는 필자를 포함해 7명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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