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6·25] ⑭공산군의 패주(2)

입력 2010-07-02 07:29:42

인천 상륙작전에 동원된 미군의 상륙정.
인천 상륙작전에 동원된 미군의 상륙정.
인천 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지휘한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육지에 오르고 있다.
인천 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지휘한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육지에 오르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30분 D-데이 H-아워.

마침내 대규모의 인천상륙작전을 알리는 역사적인 날이 밝아왔다. 한국 해병대와 혼성부대를 편성한 미 해병 제1상륙사단 5연대 3대대와 11포병중대가 상륙주정에 옮겨 타고 파도를 가르며 적전(敵前)상륙을 개시했다. 한·미 해병대는 불과 28분 만에 적이 방대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던 월미도에 상륙하면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월미도를 수비 중이던 적 1개 대대 병력 400여명 중 108명이 사살당하고 136명이 생포되었으며 나머지는 동굴 속에 갇힌 채 생매장당하고 만다.

이를 시발점으로 한·미 해병대 제5연대가 밀물(滿潮)을 이용해 레드 비치(Red Beach)에, 제1연대는 블루 비치(Blue Beach)에 각각 상륙을 감행했다. 그 뒤를 이어 미 육군 제7사단과 영국 해병대, 한국군 7연대 등이 상륙을 감행하고 끊임없는 함포사격과 전폭기 200여 대의 파상 공습으로 인천 시가지를 비롯한 반경 25마일 권역이 문자 그대로 불바다로 변해 연옥(煉獄)을 방불케 했다.

이 무렵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 해군 순양함 마운트 매킨리호(號) 함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자신이 진두지휘한 이 세기의 도박을 묵묵히 관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 맥아더 원수가 연출한 이 세기의 도박을 찬성한 미군 수뇌부는 아무도 없었다.

합참의장 오머 브래들리 원수를 비롯한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즈 대장,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 제독 등은 "낙동강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정예 해병대 등 주요 병력을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으로 빼낼 경우 대구와 부산의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무모한 작전"이라며 처음부터 반대했다. 설혹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낙동강 전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낙동강 교두보를 잃으면 결국 예비병력도 없는 상륙군 부대는 붕괴하고 만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이에 따라 콜린즈 대장과 셔먼 제독이 8월 21일 위싱턴에서 도쿄로 날아가 유엔군 총사령부에서 일련의 군사협의를 가진 것도 맥아더 원수의 고집을 꺾기 위한 설득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맥아더 원수로부터 되레 설득을 당하고 만다. 맥아더 원수가 트루먼 대통령과 브래들리 원수의 뜻을 전하며 인천상륙작전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이들 두 장군에게 이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북한 공산군의 주요 보급로는 모두 서울에 집결해 각 전선으로 뻗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적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인천과 서울을 탈환하면 적의 보급로가 완전히 끊어지고 한반도의 남반부가 북으로부터 차단돼 낙동강 전선에 집결해 있는 적의 전력이 마비되고 만다. 적은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어지면 당장 큰 혼란 상태에 빠질 것이며 상대적으로 충분한 보급로를 확보하고 있는 아군은 손쉽게 적을 압도할 수 있다. 패배를 승리로 일변시킬 수 있는 이 계획을 지금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은 낙동강 방어선에 묶여 승산 없이 질질 끌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죽음만이 남는다."

맥아더 원수의 치밀한 적정 분석과 작전계획에 감동한 그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 두 지휘관은 그 이튿날 한국의 낙동강 전선을 시찰했던 것이다. 그들 두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가진 도쿄의 군사협의에서 결국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 전선의 전세를 반전시킬 중요한 전략전술로 인천상륙작전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무렵 한국 해군·해병대와 특수유격부대가 이미 서해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전에 돌입해 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8월 20일 서해상의 전략적 요충지인 덕적도를 탈환한 데 이어 인천 남서방의 외딴섬 서어도와 선갑도를 탈환했다. 23일에는 영흥도, 9월 10일에는 연평도 등 주변의 크고 작은 섬을 모두 탈환하고 심지어 북한의 해주만(海州灣)에까지 상륙,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한국 해병대가 덕적도에 상륙한 시점에 상륙군 부대를 태운 유엔군의 대수송선단과 함대는 부산항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수송선단의 행방과 목적지의 비밀 유지를 위해 미주리호를 비롯한 각종 전함과 전폭기들은 동서 양 해안에서 무차별 함포사격과 폭격을 감행했다. 적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마디로 제2차 세계대전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작전이었다. 한·미 연합군과 유엔군으로 편성된 7만여 명의 병력과 각종 함정 261척, 미 공군의 폭격기·전투기, 항공모함의 함재기 등 항공기 3천여 대가 출동, 인천 앞바다와 하늘을 뒤덮었다. 인천항은 물론 그 주변지역까지 불바다로 만들어 자만심에 가득 찼던 북한공산집단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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