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떠나자. 복잡한 세상사 비우고 던져버리자.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허허로운 마음으로 사뿐히 몸을 옮겨보는 것이다.
'비움, 그리고 사색', 그곳은 바로 섬이다. 섬은 평온하고, 고요하다. 섬을 찾는 이들에겐 때때로 그들만의 세상도 그려준다. 그것만으로도 섬에 가는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어느 섬으로 갈까. 3천500개나 되는 대한민국의 섬을 모두 갈 수 없는 노릇. 이런저런 이유 끝에 남해바다 통영의 욕지도를 비움과 사색의 공간으로 정했다. '보석 같은 섬'은 나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아 버린 것.
지난 2일 구차한 행장은 필요가 없기에 몇 푼의 노잣돈만 챙기고 남해바다로 무작정 내려갔다. '1박 2일' 섬여행의 시작이다. 도심 탈출은 마냥 좋고, 몸이 날듯이 가볍다.
출발지는 통영의 여객선터미널. 평일이어서 드넓은 대합실은 한산하고, 섬을 오가는 토박이 아줌마, 아저씨들과 몇몇 관광객이 전부다. 오후 1시 드디어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250명 정도의 정원과 차량을 운송하는 여객선은 조용하다. 나를 포함해 승객은 고작 30여명. 기름값은 나올까. 선박 내 매점도 꽤 오래전에 문을 닫은 듯 집기만 덜렁하다.
여객선에 대한 걱정은 배 밖 풍경에 어디론가 도망가버린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바다는 잔물결조차 없이 평온하다. 물결이라곤 여객선이 만들어낸 것들뿐이었으니. 여객선 밖 풍경은 모든 게 그림이다. 일상의 찌든 것들을 훌쩍 던져버리고, 대신 그림들을 담기 시작했다.
따뜻한 햇빛은 수없이 바다에 부서져 은빛물결을 이루고, 은빛바다는 나의 눈을 멀게 할 만큼 이글거린다. 겨울의 햇빛은 섬과 섬사이의 공간마저도 비집고 든다. 여객선이 바다로 나갈수록 바다는 열리고 또 열려간다. 여객선은 바다와 섬을 뒤로 끊임없이 밀어내 버리기도 한다.
여객선 밖 섬들은 '곰, '토끼, '엄마의 젖가슴'으로 변신하더니 이내 '낙타', '바가지' 모양의 옷으로 갈아 입어 버린다. 섬은 저 멀리서, 때론 내 눈앞에 바짝 다가와 속삭인다. '머리와 가슴을 비우라'고. 섬은 그자리에 곳곳하지만 그 평온함은 숨가쁘게 달려온 나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선상에 올랐다. 찬공기는 머릿속을 시원하게 만든다. 자연의 청량제라고 할까. 선상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깊게 한 모금을 들이킨다. 도심의 담배와는 어찌 비교하랴. 선상의 담배연기는 나에게서 잡념이라는 쓸데없는 것들을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1시간 20분 정도의 뱃시간. 연화도를 들러 목적지인 욕지도의 작은 항구로 배가 들어선다. 욕지항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을 한 작은 항구다. 첫 인상은 예쁘고, 아늑하다. 욕지도는 인근에 거느린 크고 작은 섬까지 합해 2천300여명의 주민이 살아간다. 섬 크기는 전국 섬 서열 48위.
빨간색과 노란색의 등대 친구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등대는 항구의 입구에서 바다로 향해 방긋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어찌보면 등대는 홀로지만 항구를 드나드는 모든 이들에겐 고마움의 존재가 아닌가. 또한 등대는 슬픔에 잠겨 등대를 찾는 이들에게 오랜 친구도 되어준다. 외투 깃을 세운 겨울 나그네에게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 뭔가를 토해내는 곳도 등대의 끝자락일지라.
항구에는 양식장과 갈매기가 '싸움'도 한다. 독특한 광경이다. 지키려는 양식장과 뺏으려는 갈매기사이의 다툼은 섬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쉼없이 목격된다.
뭍에서 계란을 10판이나 싼 할머니, 밭에 뿌릴 비료를 산 할아버지, 이런 저런 볼일을 보고온 아주머니 일행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욕지도에 도착하자마자 24km에 달하는 섬 일주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내일까지 모두 둘러볼 요량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뗀 것이다.
욕지도는 알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섬(하고자 할 欲, 알 知)이라는 뜻으로 섬 이름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욕지도는 사방이 탁 트인 바다요,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절경이 명품이다. 부두에서 출발해 야포까지의 약 3km 정도의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동안 전형적인 어촌마을이 눈에 잡힌다.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한 폭의 그림이다. 빨갛고, 파란 지붕은 정겹기까지 하다. 섬 주위 사방의 바다에 크고 작은 '바가지(섬)'들이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버티고 있다.
하염없이 걷다가 멈추길 반복한다. 그러면서 여객선에서 담은 그림을 머리와 가슴속에 꾹꾹 저장한 뒤 욕지도의 그림을 차곡차곡 머리와 가슴에 담는다. 카메라를 연신 눌렀다. 이전 이렇게 많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 적이 없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와 은빛바다, 파도, 그리고 섬들과 점차 친구가 된다. 해안도로는 띠 모양으로 섬의 허리를 휙 두른다. 아래로는 섬과 바다를 거느리고, 위로는 푸른 산과 쪽빛 하늘을 이고 말이다. 나만 욕지도의 모든 것들을 머리와 가슴에 담고 있다고 여기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고함을 치고, 땅을 구른들 누가 간섭하겠는가. 욕지도와의 만남이 깊어갈수록 시간이 부족하다. 피곤이라는 단어도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해가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깊은 밤이 다가온다. 적막할 만큼 고요하다. 창문이 큼지막한 민박을 찾아 몸을 맡겼다. 파도와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하늘엔 도심에선 결코 보이지 않던 별들이 나에게 수없이 쏟아지고, 수평선 가까이서 서로 장단에 맞춰 반짝거린다. 깊은 명상에 잠겼고, 욕지도는 모처럼 방해받지 않는 잠자리를 나에게 제공해준다.
다음날 아쉽게도 일출을 놓쳐 버렸다. 얼마나 깊은 단잠에 빠졌기에 몸은 새털과도 같다. 또다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다가 바다와 섬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욕지도는 일출 장관이 일품인 곳(새천년기념공원)도 있고, '삼여'라는 비경도 간직하고 있다. 욕지도 해안도로에는 작은 어촌마을이 많다. 마을 모두 바다라는 정원과 전용해안, 정원 속 그림 같은 섬을 거느린다.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뭍 나그네를 이웃처럼 맞이해 준다. 삭막한 도시 공간에서 지내온 나에게 따스함이라는 인간의 정을 건네주는 것이다.
3일 정오 무렵 1박 2일의 욕지도 여행을 마쳤다. 욕지도에는 뭍 나그네들이 꼭 거쳐가는 곳이 있다. 바로 욕지도만의 해물짬봉이다. 5천원짜리 짬뽕은 나에게 해산물에서 우러나오는 특유의 육수맛을 남긴다.
오후 뱃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소주 한 잔이 나에게 건네진다. 포구의 해녀가 파는 참소라를 그냥 지나 칠 수가 없어서. 욕지도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지점에 있어 어류와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허름한 마루에 앉아 포구를 바라보며 기울인 소주와 참소라의 맛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욕지도 특산물이라는 고구마도 샀다.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군고구마의 맛에 화들짝 놀랐다. 뭍의 물고구마와 타박고구마를 반반 섞은, 꿀맛처럼 맛있는 고구마다.
섬에서의 비움과 사색은 나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머리속에 섬의 그림들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내년 겨울 다시 섬과의 대화가 그리워지는 이유가 아닐까?
글·사진 이종규기자 jongk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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