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 어머니, 5천원 아들이 감축드리옵니다"

입력 2009-07-04 07:00:00

대한민국 화폐 '빅4' 가상 회담

"어머니! 5만원권 입성을 축하 드립니다."(율곡 이이)

"우여곡절 끝에 여성을 대표해 이 어미가 나왔어."(신사임당)

"모자(母子)가 합이 5만5천원입니다."(이이)

"사임당! 일단 축하는 드리는데 조선 최고의 왕인 이 세종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니 조금 유감입니다."(세종대왕)

"전하! 얼마짜리 지폐의 주인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닌 것으로 아뢰오. 그리 따지면 저 역시 저보다 서른다섯살이나 어린 이이에게 뒤질 것이 없지요."(퇴계 이황)

"당신 말도 일리는 있소. 이순신 장군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도 지폐도 아닌 동전 주인공이 아니오. 어쩌겠소.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하는 일인 것을."(세종)

"우리 아들에겐 덜 미안하지만 만원권 세종대왕 전하와 천원권 퇴계 선생에겐 송구합니다."(신사임당)

대한민국 지폐 주인공이 4명이 됐다. 신사임당의 등장으로 세종대왕-율곡 이이-퇴계 이황 순으로 지폐 액수에 따른 주인공이 결정된 것이다.

이들 4명이 지금 시대에 나왔다면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가상으로 꾸며봤다. 지폐 주인공 '4자 회담'의 정리는 기자가 맡았다. 본격적인 회담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신사임당의 입성 소감

"막판에 과학계 대표 장영실과 각축을 벌였는데 결국 제가 됐습니다. 세종께서 다소 떨떠름하시더라도 이해해주시죠. 5만원권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한국은행은 저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 양성 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기여하고 문화중시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하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저도 나올 만하지요. 이 나라 화폐에 최초로 등장하는 역사적 여성인물이니까요. 조선시대 내조의 여왕인 제가 진보적 여성단체들로부터는 비호감이지만 다수의 보수파로부터는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등장함으로 인해 세종대왕과 10만원 수표 사이의 지폐사용 공백을 메워 이 나라 지폐 사용이 보다 효율적으로 될 것입니다. 부디 어여삐 봐주오소서. 앞으로 지폐 4자 회담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틈틈이 요리솜씨를 발휘해 간식도 싸오겠습니다."

"미국에도 100달러짜리, 유럽에도 100유로, 일본에도 1만엔 지폐가 있는데 우리도 그 금액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지폐는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지요. 잘 등장해주었소. 신사임당."(이황)

◆'3+1 체제'

"남자만 3명 있으니 매일 국사(國事)를 논하고 나라 걱정만 했는데 이제 조선시대에 가장 참한(?) 여성이 왔으니 가끔 소풍도 가고 여가도 즐기도록 하지요."(이황)

"사실 제가 5천원권 주인공이지만 가장 쓰임새가 많은 건 퇴계 선배가 주인공인 1천원권 아닙니까. 전하(세종대왕) 역시 제 어머니가 주인공인 5만원보다는 더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지폐이오니 섭섭함을 푸소서."(이이)

"그렇다. 내가 꽁한 맘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도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내가 뭐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우리 지폐 회담에도 끼지 못하고 애들 오락할 때만 쓰이니 안타깝도다."(세종)

세 주인공은 이렇듯 '3+1' 체제를 수용했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네 주인공이 그럭저럭 잘 어우러졌다.

이들의 조합도 재미있다. 모자는 5만5천원, 세종과 이황은 1만1천원, 넷이 모이며 6만6천원이다. 화투로 따져 '5땡, 1땡, 6땡'이라고 하면 너무 속된 말일까.

◆그래도 역시 '세종'

4자 회담에서 그래도 제일 어른은 세종대왕이었다. 나이(현 612세)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왕은 왕이었다. 자신보다 고액의 지폐가 나타났지만 섭섭함을 다 털어냈다.

"내 얘기를 좀 하겠소. 제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지갑 속의 영원한 대왕이 바로 짐이오. 100원에서부터 만원으로 화폐 단위와 액면 가치의 벽을 넘나든 유일한 인물이지요. 1천환권(1953년도 발행), 100원권, 1만원권 등 지금까지 4종의 지폐에 등장했습니다.(세종)

"전하! 이황 선배랑 저는 1천원권과 5천원권 고정입니다. 한번쯤 교체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저희 둘은 아마도 앞으로 몇십년간 고정이라고 합니다."(이이)

"그만큼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해방 이후 정권의 힘을 빌어 반짝 등장했다(500환 모델) 몇 년 버티지도 못하고 나갔지요. 우리 모임에 끼지도 못합니다."(이황)

실제 조선시대에도 최초로 조선통보(1492년)라는 지폐를 발행한 세종대왕은 화폐계에 데뷔(1953년)한 지 벌써 56년. 당연 최장수 모델이다. 지금은 신사임당에게 밀렸지만 그 전까지 최고액 지폐에만 용안을 드러냈다.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 관계자는 "화폐 도안 인물은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업적과 함께 역사적으로 검증돼 논란의 소지가 없어야 한다"며 "특히 세종대왕은 도안 당시 대국민 선호도 조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황, '나도 할 말 있소'

"우리 동네 안동에서는 나보고 뭐 하고 있느냐고 하오. 이이보다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아직도 불만을 토로하고 있지요. 대한민국 두번째 이지스함 이름도 '율곡 이이함'인데다 이번에 그 모친이 저보다 50배나 액면가가 높은 5만원권 주인공에 입성했소."

"정부에 항의했더니 이런 답이 왔소. '우리나라 지폐 중 가장 많이 쓰여 퇴계가 자연스럽게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고, 또 가장 많은 국민들이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본받고 있다'고."

"전하께서 화를 푸신 마당에 제가 역정을 낼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황 선배! 저도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이번에 어머니가 입성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한 건 사실이지만, 일단 던져진 주사위는 받아들입시다."(이이)

"아들아! 그래 퇴계 선생이 섭섭할 만도 해. 우리 집안에서 너무 해먹은 게(?) 아닌가 다소 미안한 마음도 드네. 그렇지만 퇴계 선생, 학문적으로 큰 뿌리를 갖고 있으니 넓은 도량으로 받아주시죠."(신사임당)

"어험, 그러지요."

◆지폐 속 뒷얘기 '이건 몰랐지?'

"1만원권은 '과학'이요. 국보 228호인 조선시대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바탕무늬로 하고 천문 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광학 천체망원경을 소재로 사용했소. 새 1만원권에는 20여 가지의 위조 방지장치도 들어 있소."(세종)

"5만원권은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부(國富)는 '그 사회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라고 규정했는데, 5만원권으로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다면 스미스의 견해로는 그만큼 더 부국이 되는 셈입니다. 제가 수표 발행 비용도 줄이고 경제도 활성화시키는 데 일조하겠습니다."(신사임당)

"9년 전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한 '현용 화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지폐 인물로 누가 좋으냐'는 질문에 이황 선배가 9위, 제가 10위를 차지해 교체될 뻔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웅 이순신 장군보다 선호도에서는 많이 밀리죠. 문신 우대 때문인가?"(이이)

"난 인색하게 보인다고 인자한 얼굴로 성형수술을 했소. 구권의 초상화에 유난히 앙상한 볼과 긴 얼굴이 특징인데 신권에는 콧대를 두껍게 수정해 전체적으로 코의 길이가 짧아 보이도록 고쳐놨소. 상대적으로 인중도 이전보다 길어 보이고요. 도드라져 보였던 광대뼈도 낮춰 얼굴 윤곽이 한층 부드럽게 보이도록 고쳤소. 시대가 좋긴 좋소."(이황)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그래픽·편집미술부 고민석 komindol@msnet.co.kr

※신사임당은? 1504~1551년. 강원도 강릉 출생. 문인이자 화가. 남편 사헌부 감찰 이원수, 아들 율곡 이이. 메뚜기를 화폭에 그렸는데 닭이 와서 쪼을 정도의 그림 솜씨. 시 '사친', 그림

'산수도' '자리도' '초충도' 등

※세종대왕은? 1397~1450년. 서울(한양) 출생.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12세에 결혼, 22세에 왕이 됨. 대마도 정벌(23세), 집현전 개창(24세), 광화문 건립(35세), 측우기 제작(45세), 훈민정음(한글) 창제(47세)

※율곡 이이는? 1536∼1584년. 강원도 강릉 죽헌동 출생. 문신, 성리학자.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 부친은 사헌부 감찰 이원수. 찬성에 추증된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에 글을 깨침. 10만 양병설 주장, 저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

※퇴계 이황은? 1501~1570년. 경북 안동 출생. 부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 문신. 성리학자. 33세에 문과에 급제. 단양군수·풍기군수를 지낸 뒤 낙향해 도산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침.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 입장. 저서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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