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내가 뭘 본거지?…영화 '박쥐'

입력 2009-05-02 06:00:00

어떤 영화를 봤느냐는 지인의 물음에 한동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무슨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으면 제목만 말하고 끝냈을 것을, '어떤 영화'라는 질문은 곤란하기 짝이 없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 같은 영화는 '어떤'이라는 수식어 속에 집어넣기가 무척 힘들다. 극장 문을 나서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지?'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핏빛 낭자한 화면과 주인공들의 관능적인 정사 장면, 그리고 심각할 만한 장면마다 터지는 우스갯소리 때문에 생각의 실타래는 더욱 엉키고 말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뱀파이어

'박쥐'는 줄거리를 전부 들려준다고 해도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만한 작품이다. 파격적인 화면 구도와 흰색과 붉은색의 묘한 대비 속에 빚어지는 긴장감, 대사로 미처 전하지 못하는 눈빛 이야기들, 그리고 한마디씩 툭툭 던져대는 유머는 글로써 옮겨내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활자로 찍어낸다고 해도 그 감칠맛을 살리기는 힘들 성 싶다. 오히려 줄거리를 알고 영화를 본다면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까 궁금해하는 탓에 자칫 놓쳐버릴 수 있는 영화 속 섬세한 장치들을 보다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스포일러'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전체 스토리를 담아낼 수 밖에 없는 변명은 이쯤에서 접고 본격적인 영화 '박쥐' 이야기로 옮겨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 가톨릭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죽음을 앞둔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서 시작한다. 숨 쉬기 거북할 정도로 비대한 몸집의 환자는 하루 종일 품고 다니던 카스텔라를 배고픈 남매에게 건네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30년 전의 일인데, 하느님이 기억하실까요?"라고 묻는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고해성사처럼 이야기를 건네는 자못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상현이 던지는 답은 "당근이죠."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지 첫 대목부터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상현은 아프리카에서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실험하는데 자원하고, 500여명의 지원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정욕에 눈을 뜬 것은 인간인가, 뱀파이어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암시하는 이런 과정(사실은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받아 자신도 뱀파이어가 돼 버린)을 거친 뒤 상현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나고, 그에게 한 중년 여성이 찾아와 암에 걸린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알고 보니 아들은 자신이 어린 시절 부산에 살 때 알고 지내던 친구.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라면도 먹고 그랬잖아"를 반복하는 친구 어머니(김해숙)를 따라 친구 강우(신하균)의 집에 간 상현은 그의 아내 태주(김옥빈)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 태주는 원래 강우의 집 문간방에 세들어 살았지만 '공고 밖에 안 나온' 아버지가 3살 난 태주를 두고 도망가는 바람에 그 집에서 '강아지처럼, 딸처럼' 자랐다. 그 집에서 태주가 가혹한 처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상현은 '지옥에서 구해주겠다'며, 함께 떠난 밤 낚시에서 강우를 물에 빠뜨려 살해하고 만다.

이후 상현과 태주는 살인에 대한 죄의식으로 몸부림친다. 둘이 정사를 나누는 가운에 끼어 누운 강우의 모습은 관객을 섬뜩하게 만든다. 비록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라며 이들은 자위하지만 죄의식의 고통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고, 격렬한 다툼 끝에 상현은 결국 태주를 죽이고 만다. 하지만 숨이 완전히 먹기 전에 상현은 자신의 피를 태주에게 먹이며 그를 뱀파이어로 변신시킨다. 이후 태주는 피를 갈구하며 살인을 서슴치 않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상현은 밤을 달려 승용차를 타고 인적도 없는 바닷가로 간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반항하던 태주도 결국 승용차 보닛 위에 앉아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 상현과 함께 한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재미있는 영화지만 지나친 기대는 마시라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구?" 비록 잘 만들어진 탄탄한 영화이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너무 많았던 탓일까? 영화는 '친절한 찬욱씨'와는 거리감을 두었다. 김옥빈의 몸매와 연기는 눈부셨지만 남편 강우 및 시어머니와의 갈등, 그리고 남편 살해에 동조한 뒤 후회하는 장면에서는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 게다가 뜬금없이 삽입된 남편의 친구(상현이 아닌 다른 인물)과의 정사 장면이라니. 본능만을 추구하는 인간(아니 뱀파이어)의 탐닉을 비웃자는 의도일 지 몰라도 관객에게는 불친절하게만 느껴진다.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악마적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웃음의 친철이 지나쳤다.

피식거리고 깔깔거리는 속에 진중한 무게감을 더하려 했는지, 아니면 자칫 너무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보다 냉소적으로 다루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핏빛 낭자한 살해 장면이 끝나고 태주는 죽은 자의 목덜미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댄다. 하지만 피는 이내 멈춰버려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보며 상현이 던지는 말. "죽으면 심장 펌핑이 멈춰서 피가 나오질 않지. 그렇게 조금만 빨다가 버리면 인명 경시 같기도 하고. 욕실에 매달아 놓고 발을 자르면 중력 때문에 피가 계속 나오는데. 락앤락에 넣어두고 먹어도 되고." 이왕 피를 빨기 위해 죽였으면 피 한 방울 함부로 낭비하지 말라는 뜻인가. 아무튼 영화는 재미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거치며 '박쥐'를 꿈 꾸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번 영화는 박찬욱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측면이 강하다. 다만 너무 기대하고 본다면 오히려 영화를 보는 시선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평점에서 '박쥐'는 6점에도 못미치고 있다.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무게감이 지나친 기대감을 눌러버린 탓은 아닐까?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 평론가들이 보내는 찬사와 관객들이 받은 느낌 사이에 너무 큰 간극이 존재한다면 누구 탓으로 봐야 할까? 참고로 송강호가 리코더로 연주한 곡은 바흐의 칸타나 82번이다. 아울러 송강호의 노출장면은 떠들썩한 것만큼 대단(?)할 것 없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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