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거탑'. 일본의 여류작가 야마자키 도요코가 쓴 원작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인 의과대학생일 때였다. 서점의 구석진 곳에 숨어 있던 몇 권으로 된 장편소설을 무심코 꺼내어 보니 병원 이야기였고, 호기심에 사서는 한꺼번에 다 읽었었다. 소설은 재미는 있었지만 병원내의 권력투쟁으로 시작해서 후반부에는 의료사고를 다루는 법정이 무대가 되어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조금 입맛이 씁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수술실의 긴박한 분위기와 외과교수의 경쾌하고 현란한 수술솜씨가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눈길을 끌었다. 그것이 내가 외과의사가 되는데 조금의 영향이라도 주었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지금은 국립대학병원의 위암수술 전문인 외과의사가 되어 우연히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하얀거탑'을 다시금 접하게 됐다. 그간의 트렌디 드라마들에 식상하였던 시청자들에게는 소재가 비교적 새롭고 극 전개도 경쾌해 나 역시 눈길이 갔다. 하지만 문제는 드라마의 내용이 어디까지나 30년 전에 출판된 일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우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일인 독재체제의 병원? 천만에!
일본의 의과대학과 병원제도는 독일식을 따르고 있어서 미국식과 같은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일본처럼 1인 교수 제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각 과마다 여러명의 교수가 있으며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까지는 호칭이 모두 '교수'로 불리며 업무에 있어서도 비교적 독자성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80년대까지는 과장직이 정년퇴임때까지 보장되는 종신제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면서 과장은 선출직이 아니라 2~6년마다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맡는 형식으로 변화했다. 역할도 주로 행정적인 업무에 한정될 뿐이다. 그래서 인원이 적은 과의 경우는 가장 젊은 교수가 과장을 맡아 '잡무'를 도맡아 처리하기도 한다.
게다가 '교수부인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들은 적이 없고, 드라마에서처럼 서로 다른 과의 교수 부인들이 공식적으로 같이 몰려다니는 이야기는 더욱 생경스러울 뿐이다.
#환상적인 수술장면, 과연?
대체로 외국이건 국내건 의학드라마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외과가 단골로 등장하고, 외과를 지망하는 의사들도 그 이유가 환자의 치료에 '극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극적' 효과를 노리는 드라마일수록 주인공들의 수술 장면은 대체로 호들갑스럽고 동작이 크다. '손이 빠른 것과 멋대로 하는 것이 구별돼야 하고, 세심한 것과 쪼무락대는 것이 구별돼야 한다.'는 외과계의 속담이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도 차인표(노민국 역)가 화려한 수술솜씨를 뽐내는 장면을 촬영하고 나니 환자 대역용 인형의 뱃속이 엉망이 되었더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 '수술은 잘 되었는데 환자는 죽었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질병'이라는 일부만을 너무 쫓다보면 '환자'라는 전체를 다치는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수술의 강도(근치성)와 환자의 안전성은 각각 저울의 반대쪽에 위치하고 그 저울을 조절하는 것은 집도의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도 기(技)와 예(藝)의 경지를 넘어 도(道)의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데 사실 이것은 비단 환자에서 뿐 아니라 나라 살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요즘 우리는 몸소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왜 여전히 외과의사인가?
사실은 외과가 이렇게 극적인 이유는 결국 환자의 생명에 깊이 개입하고 관여하기 때문인데 요즘의 많은 의사들은 이런 것을 도무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워한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생명'이 '미용'보다 훨씬 값싼 의료수가를 애써 외면하면서 의사들에게 사명감만을 요구하기도 난감하기만하다. 이런 점들을 헤아려야하는 분(?)은 자신의 '미용'에만 관심이 있으니 우리 국민들의 '생명'은 더욱 모질고 딱하다. 새내기 의사들이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과를 점점 선호하는 우리의 의료현실에서 '생명'을 다루는 '외과'가 인기 드라마에 계속 등장하는 것도 참으로 흥미롭고, 또 안타까운 사실이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