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물동 작업실은 도시의 삭막한 냄새가 풍겨서 오래 버티기가 힘이 든다. 나는 대충 가방을 꾸려서 성주 수륜에 있는 집으로 간다. 15년째 기거하면서 작업하는 이곳은 정이 많이 든 곳이다.
서부정류장에서 잔치국수를 한 그릇 말아먹고 시골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손님은 기사를 빼고 나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와 달랑 두 명이다. 버스 기사는 뭐가 불만인지 꿍꿍거린다. 승객이 적게 타면 이 버스도 없어질지 모른다. 교육과 문화에서 농촌은 소외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리고….
계속 졸듯한 눈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한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들판은 황량하다. 그러나 그 가을 들판의 허전함을 상쇄하는 것은 가을햇살이다. 따갑게 비치는 가을햇살은 산야의 단풍을 더 붉게 하고 가로수와 짚더미의 음영을 짙게 하여 더 확실히 시야에 다가오게 한다.
고령에 오니 촌로들이 몇이 더 탄다. 운전기사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하다. 손님들과 농담도 주고 받으면서 시골길을 달린다.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빨간 사과가 빼곡히 달려 있다. 탐스럽고 색깔이 고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픈 충동을 느낀다. 크고 작은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푸른 바탕의 큰 그림은 힘이 있으면서도 묘한 느낌을 자아내리라. 나의 그림에 대한 지난 시절 작가노트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나의 그림 제목을 '나는 집으로 간다'라고 하는 것은 화가로서의 신념과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며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나의 그림에서 한국미의 정체성을 모두 찾기를 바라지 않으나 근접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그림을 쉽고 소박하게 그리고 싶다.
호박을 많이 그리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호박을 키우고 먹고 썩어가는 호박을 바라보면 생물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자연 속에 살고 자연을 그리고 그 무엇을 깨닫는 생활! 비록 가난할지언정 해볼만 하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하며 집에 도착하니 나를 반기는 건 동네 개들이다. 개들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선 컹컹 하고 짖고 본다.아직 텃밭엔 백일홍이 드문드문 피어 있고 고추가 푸르고 붉게 매달려 있다. 열리다 만 가지도 두어개 달려 있고 둥그런 호박 하나가 마당 한구석에 파란 이파리를 달고 누워 있다. 봄에 심은 토마토 줄기에 아직 빨간 열매가 달려 있기에 몇 개 따서 입에 넣으니 참 달다. 어수선한 잡초와 상처 뿐인 모과 열매, 대나무 숲에서 나는 이름모를 새소리,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개암나무, 소담하게 핀 흰 국화, 노랗게 물들어가는 석류나무…. 이러한 정경들이 집 주위 풍경의 전부이지만 모두 정겹다.
화실 문을 여니 내 땀과 손때가 묻어있는 화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나는 집으로 간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나의 그림의 근원이 될 때까지 나는 집으로 간다. 가끔씩은 술집으로도 가지만 그래도 나는 집으로 간다.
정태경(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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