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개혁-(16)3천궁녀는 사실인가

입력 2004-04-14 09:00:41

낙화암에서 3천궁녀가 떨어졌다는 전설은 사실인가. "삼국유사"'태종 춘추공'조는 "백제고기(百濟古記)"라는 책을 인용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부여성 북쪽 귀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아래로는 강물이 흐르는데 전해오는 말로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들어가지는 말자"라고 하면서 서로 이끌어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한다'

'타사암'이 훗날 궁녀들을 꽃에 비유한 낙화암(落花岩)이라는 시적인 이름으로 바뀐 것인데, 이 기록은 떨어져 죽은 궁녀의 숫자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과거 궁녀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인사(人事)'조에서 '환관은 335명이고 궁녀는 684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영조실록" 13년(1737) 4월 '육백여명이나 되는 궁녀가 있는데 또 뽑으려고 하는가'라는 기록에서도 사실로 입증된다.

영조 15년 무렵 조선의 인구는 기록상으로는 166만호(戶)에 700만명 정도지만 이는 상당 숫자가 누락된 것이고 실제로는 1천50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76만호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 인구의 5분의1 정도이다.

이런 인구의 백제에서 3천궁녀가 있을 수 없으며 멸망 당시 수도였던 부여 사비성의 크기 또한 3천궁녀가 존재할 수 없었다.

일연은 앞의 타사암 기록을 전하면서 "궁녀들은 여기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은 당나라에 가서 죽었다는 사실이 당사(唐史)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적고 있는데 실제 떨어져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숫자는 수십명을 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는 의자왕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궁녀들도 당나라로 끌려갔을 개연성이 높다.

삼천이란 숫자는 조선의 시인들이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전설이 된 것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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