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석-지면별 다양한 독자취향 수용을

입력 2004-04-02 09:27:38

요사이 신문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신문의 세계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는 점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동하는 정치판에 대해 흔히들 정치가 유기체라고 말한다.

시쳇말로 전쟁터인 것이다.

신문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독자위원으로서 내가 제언하는 것이 무수한 병기(兵器)와 전략을 소유한 편집자들 앞에 얼마나 유효할까 싶다.

이러한 난감한 처지를 인정하면서도 순수한 독자의 입장에서 말해보라는 '독자위원'의 취지에 맞춰 몇 가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왜 신문을 읽는가'하는 보다 원론적인 접근에서 두 가지 소견을 밝혀보자.

첫째는 신문이 다양한 독자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구 경북의 인구만 해도 500만 명이 된다.

이들이 종사하는 곳이나 관심도가 각각 다를진대 신문편집이 맥락을 잃기 십상이다.

이 부분은 신문편집의 방향성에 관한 문제이므로 우선 신문의 이념적 성향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언론을 대표하는 '매일신문'이 특정한 이념을 내세우기보다 지역민의 여론을 반영하고 선도한다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독자의 다양한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야하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이다.

독자의 취향을 최대한 수용하는 일은 지면과 필자의 제약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고개를 흔들 수 있으나, 사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협소한 지면에서도 독자의 취향을 수용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보인다.

가령, 식당 운영을 계획하는 자영업자와 예술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각각 신문을 구독한다고 했을 때, 이들이 주시하는 면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각기 다른 갈증을 해소하는 길은 지면의 다양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정보가 제공될 수 있는 지면의 깊이에 있는 것이다.

독자는 신문의 모든 면을 살펴보지 않는다.

선택적 읽기를 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제대로 된 기사가 일주일에 한번 나오면 그 신문을 구독하고, 두 번 나오면 기사가 실리는 '요일'이 기다려진다.

이럴 경우, 최악의 기사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진다.

독자의 의향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정보를 건네지 못하는 기사가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식당영업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신문의 의미는, 일주일에 한두번 실리는 '선택적 지면'을 통해 어떤 '감'을 얻으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가독성(可讀性)과 구독성(購讀性)의 문제이다.

가독성과 구독성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신문의 각 지면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당연히 4단 만화와 스포츠면이 최고의 가독성이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그후로 어떤 신문들은 종합일간지에 만화까지 연재했다.

그러나 누구든 만화를 보려고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스포츠신문에서는 종종 만화를 보지만 기이하게도 중앙일간지에서 보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여기곤 했다.

세태풍자를 하는 4단 만화면 충분하다.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구독을 재촉하는 기사들이 있다.

이것은 기사의 전문적인 수준을 일컫는 말이 결코 아니다.

수준이 아니라 독자 앞에 펼쳐놓은 선택적인 깊이이다.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자로서 '매일신문' 문화면이 선택적 깊이에서 얼마나 유효한지를 앞으로 판단해야겠다.

엄창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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