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아버지의 빈 봉투

입력 2002-12-10 15:40:00

이번 학기에는 한국문화사를 인터넷 강좌로 개설했다. 그런데 인터넷 강좌는 학생들을 마주볼 수 없어 학생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그래서 각 단원마다 일상생활과 연결된 작은 과제들을 주문하게 되었다.

한국의 종교문화라는 단원에서 여러 종교가 모두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해 왔던 사실을 토론하게 되었다. 나는 이점에 초점을 두고 효의 실천과 관련된 과제를 요구했다. 사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가장 큰 격려를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이이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면이 간혹 뒤섞여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 사랑이라는 관계를 일상생활 속의 작은 몸짓으로 창조해 가도록 하는 주문이었다.

처음에는 한 학생의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그리고 한두 학생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부모님을 학교에도 초대하고, 피자가게, 영화관, 맥주집, 찜질방 등에 모셨다고도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것이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작은 일에 기뻐하실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어머니도 피자나 영화구경을 좋아하는지를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분들에게도 소년, 소녀시절이 있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고 했다.

남학생 한명은 아버지 생신을 맞이하여 새벽에 일어나 몰래 미역국을 끓여 놓고 다시 잠을 청했단다. 그런데 아침에 식사 준비하러 나간 어머니가, "여보, 당신 아들이 돼지고기 미역국을 끓여 놓았네요" 하고 크게 외쳤다. 돈이 모자라서 돼지고기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는 학생의 해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돼지고기 미역국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실, 효는 한국문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인류문화를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한 아놀드 토인비는 처음에는 한국을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규정했다. 그러다가 그는 한국문화를 더 성찰한 결과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권임을 확인했다. 그는 한국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효도의 문화를 주목했다.

그는 한국인은 이 효 문화로 인류에 공헌할 수 있으리라 전망했다. 그러나 우리의 그 효는 너무나 큰 것을 희생하면서, 언제 올는지도 모를 취직할 날, 성인이 될 날을 기다리면서 관념 속에서만 살아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난 가을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겉봉에 내 주소만 써 놓고 속지가 없는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셨을까? 나는 공부를 잘 했다. 또 크게 일을 저지른 적도 없어서 내 모습이 눈에 거슬리지도 않은 편이었다. 부모님들은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셨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 머릿속에 있는 딸이었을 뿐이다.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부모와의 공유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체험하게 하고 싶다.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많이 사랑해요"라고 말했다면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난 그 모습을 그리며, 내 학생들을 통해 아버지가 남기신 빈 봉투에 이 이야기를 써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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