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동포 100년-(6)민단 창단

입력 1999-10-22 14:27:00

1946년 10월3일 일본 도쿄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는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2천여명의 재일동포들이 모인 '재일조선거류민단' 창단대회가 열었다. 이 자리에는 신조선건설동맹, 건국촉진회 등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20여개 단체의 대의원 218명도 함께 운집해 열기를 띠었다.

이날 역사적인 이 창단대회에서는 신조선건설동맹의 위원장이었던 박열(朴列)씨가 초대 단장으로 선출됐다. 박열씨는 정치범으로 23년간 아키다(秋田)형무소에서 복역하고 해방 후 석달만에 석방돼 거류민단 창단을 준비해 왔었다.

민단 선언서에 나타난 창단 목적에는 재류동포의 민생안정, 재류동포의 교양향상, 국제친선이라 밝히고 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민단은 제2의 선언을 하게 된다. 정부는 민단을 유일하게 인정한다는 것으로 발표하자 그해 가을 중앙대회에서 명칭을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꾸었다. 또한 정부의 국시에 따르는 민단 강령을 채택했다. 5대 강령은 첫째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 둘째 재류동포의 동포인권 옹호, 셋째 민생안정, 넷째 문화향상, 다섯째 국제친선이었다.

그후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되면서 민단은 본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와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민단은 재일동포들의 최고 최대의 행정서비스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 당시 민단 조직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혁명적 지도자의 상징을 요구하던 세대에서 점차로 행정적인 지도력을 요구하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따라서 초대 단장이었던 박열씨의 지도력은 그 임무를 다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박단장은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후 그는 6·25사변 도중 북한에 납치돼 지금도 생사를 모르고 있다.

1976년 3월에는 도쿄 미나토(港)구에 재일한국인들의 숙원이었던 중앙회관이 준공됐다. 지하 1층 지상 11층의 이 건물에는 민단 중앙본부 및 산하단체와 대사관 영사과, 한국문화원 등이 들어있다.

민단은 1994년 48주년 중앙대회에서 그 동안 명칭에 넣어 사용해오던 '거류'를 삭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고쳤다. 이는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거류에서 '정주'로 천명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朴淳國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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