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이탈리아 북부에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호수들이 많다. 에메랄드빛 물결이 보석처럼 빛나는 호수, 호숫가를 감싼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호수, 그리고 바다처럼 파도가 일렁이는 호수까지. 그런데 사진 속에서는 그토록 아름답던 풍경이 막상 눈앞에 펼쳐지면 어쩐지 다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흐린 날씨 때문일까, 예상과 다른 호수의 규모 때문일까. 아니면 사진으로 미리 보았던 풍경과 실제로 마주한 풍경 사이에 카메라의 렌즈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계획에 없던 선물, 산 펠레그리노
아침의 문을 열자 호수가 거기 있었다. 돌로미티(Dolomiti) 트레킹을 위해 산 펠레그리노 고개(Passo San Pellegrino)에 있는 호텔 몬조니 산 펠레그리노(Hotel Monzoni San Pellegrino)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1899년에 세워진 숙박시설이었다. 지친 피로를 풀고자 머물던 근처 호수를 찾아 걸어갔다. 차가운 아침 공기와 아침 햇살이 동시에 다가오던 가벼운 산책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호숫가에 들어서자 발걸음이 놀라서 멈췄다. 호수 위로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높은 하늘에는 이미 아침 해가 떠 있었지만, 호수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햇살은 안개를 연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물 위에 반영된 숲의 모습까지 아침 호수의 모습을 신비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호수의 이름은 산 펠레그리노(Lago di San Pellegrino). 해발 약 1,9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와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날 아침에는 물안개가 풍경의 일부를 감추면서 호수의 끝을 쉽게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호수는 실제보다 더 넓었고 더 깊었다. 호숫가에는 입구에 놓인 물고기 조각상을 시작으로 여러 개의 조각들이 있었다. 작은 다리와 나무 데크를 지날 때마다 서로 다른 작품들이 호수를 지키고 있었다.
낯선 방문객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건네게 된다. 나는 작은 바위 위에 올라 조각상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거미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거대한 거미를 형상화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 "마망(Maman)"을 떠올리게 했다. 이 거미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숲속에서 슬며시 나타난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자연과 예술이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나란히 존재하는 모습이었다.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지만, 물안개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신비한 호수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끝내 다 돌지 못한 호수, 브라이에스
남티롤(Südtirol)의 산악 지대에 자리한 이 브라이에스 호수(Lago di Braies)는 해발 약 1,500미터에 놓여 있다. 호수 뒤편으로는 해발 2,810미터의 크로다 델 베코(Croda del Becco)가 솟아 있다.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암석이 계곡의 물길을 막으면서 형성된 호수로 알려져 있으며, 산과 호수가 만들어 내는 장대한 풍경으로 많은 여행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호수 둘레는 약 4킬로미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반 남짓이면 돌아볼 수 있는 코스였다.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여러 각도에서 풍경을 바라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연은 여행자의 계획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돌로미티의 험준한 봉우리 사이를 휘돌아치는 바람은 온몸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들어갔다. 창밖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두 손으로 감싼 커피잔은 다행히 따뜻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할까? 먼 길을 왔는데 호숫가를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에 잠겨 있는 사이 커피잔은 비워졌고, 다행히 비도 그쳤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다시 비가 쏟아질지 알 수 없었기에 호숫가로 향하는 발걸음은 당연히 빨라졌다. 그러나 비가 지나간 길은 질척거려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를 따라 계속 나아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자꾸만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호수 한 바퀴를 트레킹 하겠다는 계획은 접어야 했다. 그런데도 비가 그친 뒤의 산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짙은 빗물을 머금은 듯 어두워진 산의 능선과 바위에 내려앉은 구름, 그 사이로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 문득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떠올랐다. 비 온 뒤 산의 묵직한 기운이 번져 나오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게 해주었다. 눈부시게 맑은 날에는 호수의 에메랄드빛을 보았겠지만 비 갠 뒤 브라이에스 호수의 풍경은 그만큼 드문 풍경이었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머물렀다면 산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겠지만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여행자는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섰다. 그 아쉬움까지도 브라이에스의 일부가 되어 마음 한쪽에 미완성의 풍경으로 남은 것이다. 여행에는 끝내 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다 걷지 못한 길, 들어가지 못한 건물, 날씨 때문에 놓친 전망. 여행이 끝나면 그런 것들은 사라질 것 같지만, 뜻밖에도 기억은 완성된 장면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브라이에스 호수의 전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곳의 나머지 풍경을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지개는 어디에 있었을까, 카레짜
사쏘 포르도이(Sass Pordoi)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카레짜 호수(Lago di Carezza)에 들렀다. 사진 속 호수는 에메랄드빛 물 위로 라테마르 산군(Latemar Massif)이 선명하게 비치는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햇빛과 계절에 따라 물빛이 달라져 무지개 호수라고도 불린다는 설명에 기대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실제 호수는 생각보다 작았다.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20여 분이면 충분할 만큼 아담했다. 짙은 청록색 물에는 산의 반영도, 기대했던 무지개도 없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둘러친 펜스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며 한 바퀴를 돌았지만, 먼 길을 찾아온 만큼 아쉬움이 남았다. 호수를 떠나며 문득 생각했다. 무지개 호수라는 이름이 내가 도착한 날의 풍경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구나. 그날 카레짜 호수에는 무지개 대신 뜨거운 햇살 아래 고요한 청록색 물과, 펜스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있었다.
◆호수를 따라 살아가는 마을들, 가르다
산악 지대의 호수들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자 풍경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가르다 호수(Lago di Garda)는 북쪽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남쪽의 완만한 풍경으로 이어진다. 호수를 따라 세 마을을 만나는 동안, 하나의 이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르다 호수의 여러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수 남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의 끝에는 시르미오네(Sirmione)가 자리하고 있다. 호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길 끝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스칼리제로 성(Castello Scaligero)이다. 물길을 지키듯 서 있는 견고한 성벽과 탑, 성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중세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문을 지나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골목마다 이어진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곳은 물과 역사가 어우러진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이했다.
동쪽 기슭의 말체시네(Malcesine)에서는 분위기가 한층 서정적으로 바뀌었다. 호숫가에는 백조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스칼리제로성 뒤로 해발 2,218미터의 몬테 발도(Monte Baldo) 산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올리브나무 아래 꽃이 핀 창가와 낡은 돌벽, 물가에 묶인 배들이 어우러져 마을의 느린 일상을 보여 주었다. 운 좋게도 선상 결혼식이 열리는 순간을 목격했다. 배 위에서 웃고 떠드는 신랑과 신부 일행의 모습에 여행자의 풍경 속으로 누군가의 특별한 하루가 들어왔다.
말체시네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풍경화 "가르다 호숫가의 말체시네(Malcesine on Lake Garda)"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림 속 붉은 지붕과 다채로운 창문이 모자이크처럼 어우러지듯, 실제 마을의 건물들도 저마다의 색으로 풍경을 채우고 있었다. 호수와 산, 건축물이 빚어내는 색채의 조화 속에서 클림트가 이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쪽 기슭의 리모네 술 가르다(Limone sul Garda)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레몬 향이 여행의 기억을 채웠다. 가파른 바위산과 호수 사이 좁은 땅에 자리한 이 마을은 온화한 기후를 이용해 오래전부터 레몬을 재배해 왔다. 레몬은 이제 농작물을 넘어 마을의 정체성이 되었다. 골목과 상점마다 레몬을 활용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노란빛은 호수의 푸른색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지만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레몬 향이 감도는 골목을 걷다 유명한 레몬 샤베트(Sherbet)를 맛보았다. 차갑고 새콤한 한입에 더위가 잠시 잊혔다. 하루의 끝을 장식한 것은 거창한 풍경이 아니라 입 안에 남은 상큼함과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궁전, 마조레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에 도착하자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시 달라졌다. 이탈리아어로 '더 큰'이라는 뜻을 지닌 마조레 호수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걸쳐 있으며, 오래전부터 귀족과 부유층의 휴양지로 사랑받아 왔다. 산악 호수의 거친 기운과 달리 호숫가에는 오래된 별장과 정원이 고전적인 유럽 휴양지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은 배를 타고 이솔라 벨라(Isola Bella)로 향했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궁전과 계단식 정원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 선명해졌다. 보로메오 가문(Casa Borromeo)이 조성한 궁전은 정교한 장식과 미술 작품으로 가득했고, 밖으로 나오자 조각상과 분수, 이국적인 식물이 어우러진 정원이 펼쳐졌다. 자연 위에 인간이 얼마나 화려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풍경이었다.
이솔라 벨라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루이 비통(Louis Vuitton)도 주목했다. 2023년 5월, 루이 비통은 이곳의 보로메오 궁전(Palazzo Borromeo)과 계단식 정원을 배경으로 2024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를 열었다. 바로크 양식의 조각상과 이국적인 식물,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고급스럽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브랜드는 상품 자체뿐만 아니라 상품이 놓인 장소와 분위기를 통해 사람들이 동경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화려한 정원에서 내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뜻밖에도 새하얀 공작이었다. 공작은 조각상과 분수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원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바라보니 오히려 정원이 공작을 위해 마련된 무대처럼 느껴졌다. 루이 비통이 이곳의 화려한 풍경을 패션쇼의 무대로 삼았다면, 내게 이솔라 벨라는 공작이 자유롭게 거니는 무대였다.
◆풍경은 기억 속에서 또다시
이탈리아 북부에서 만난 다섯 호수는 저마다 다른 얼굴로 기억에 남았다. 산 펠레그리노에서는 물안개가 빚어낸 우연한 아침을 만났고, 브라이에스에서는 끝내 완성하지 못한 산책의 아쉬움을 안고 돌아섰다. 카레짜에서는 기대했던 무지개를 보지 못했으며, 가르다에서는 호숫가에 뿌리내린 마을들의 다채로운 삶을 만났다. 마조레의 이솔라 벨라에서는 화려한 궁전과 정원보다 그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던 하얀 공작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많은 것을 계획했다. 가야 할 곳을 정하고, 날씨를 확인하고,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기억 속에 남은 풍경은 계획한 순서와 달랐다. 기대했던 장면보다 뜻밖의 순간이 더 오래 남았고, 아쉬움으로 돌아섰던 장소조차 여행의 일부로 기억되었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한다. 완성된 일보다 미완성된 일이 더 오래 기억되는 심리 현상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궁금한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하는 '클리프행어(Cliffhanger)' 기법이 대표적이듯이. 여행은 떠나기 전에 계획하지만, 기억은 돌아온 뒤에 제멋대로 풍경을 고른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뜻밖이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