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군주'는 왜 행동력이 늘어날까? 울티마 시리즈·삼국지5가 李정부에 던지는 질문 [시사뒷담]

입력 2026-10-11 11:59:00 수정 2026-10-11 12: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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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티마 IV 시작 화면.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울티마 IV 시작 화면.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게임을 하다 보면 현실보다 훨씬 단순하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인 정치철학을 만날 때가 있다. 착한 일을 하면 군주 캐릭터의 평판이 올라간다. 백성에게 인기가 높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 게임 속 물건 하나 사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동료와 백성들이 이탈한다.

게임 속에서는 이런 추상적인 관계를 숫자로 보여준다. 그런데 40년 가까운 게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보인다.

처음에는 '착하게 살아라'였다. 그다음에는 '좋은 정치를 하면 더 큰 힘을 얻는다'가 됐다.

최근 게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런데 누구에게 좋은 정치인가.'

게임이 점점 현실 정치를 닮아간 셈이다.

울티마 IV에서
울티마 IV에서 '미덕'을 다루는 부분.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1985년 울티마…괴물보다 어려운 '좋은 사람이 되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게임은 '울티마 IV: 아바타의 길'이다. 1985년 나온 컴퓨터 역할수행게임(RPG)이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하면 끝날 것 같지만 이 게임은 달랐다. 플레이어의 최종 목표는 강한 전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게임에는 정직·연민·용기·정의·희생·명예·영성·겸손이라는 8가지 미덕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눈이 보이지 않는 상인에게 물건을 살 때 플레이어가 실제 가격보다 적은 돈을 내도 당장 들키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은 기억(정확히는 데이터로 기록)한다. 그 순간 '정직'이라는 미덕에서 멀어진다. 반대로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나눠주면 연민이라는 가치에 가까워진다.

말하자면 1985년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물었던 질문은 간단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착하게 행동할 것인가.'

울티마 V 표지.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울티마 V 표지.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그런데 후속작에서는 '착함'이 폭정이 됐다

이 시스템은 후속작 '울티마 V'에서 또다른 모습을 보였다.

전작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추구했던 미덕을 새로운 통치자 블랙쏜이 법률로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직해야 한다' '연민을 가져야 한다' '정의를 지켜야 한다'

말만 들으면 나쁠 것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혀를 잃고, 희생을 실천하지 않으면 재산을 빼앗기는 식이다. 좋은 가치가 국가의 강제력과 결합하면서 '미덕'이 '폭정'으로 바뀐다.

그래서 울티마 시리즈가 던진 질문은 한 단계 깊어진다.

'좋은 목적을 가진 통치는 언제나 좋은 통치인가.'

좋은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좋은 사람이 될 자유를 남겨주는 것은 같지 않다는 얘기다.

삼국지5 게임 화면 인물(조조) 아래 하트(♡) 옆 명성 수치(724)와 그에 따른 아래 행동력 수치(5번 명령 가능)가 표시돼 있다. 코에이(KOEI)
삼국지5 게임 화면 인물(조조) 아래 하트(♡) 옆 명성 수치(724)와 그에 따른 아래 행동력 수치(5번 명령 가능)가 표시돼 있다. 코에이(KOEI)

◆1995년 삼국지5…백성이 좋아하면 '명령'을 더 내릴 수 있다

10년 뒤 일본 코에이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5'에도 평판 시스템이 등장했다. 바로 '명성'이다.

삼국지5에서 플레이어는 조조·유비·손권 같은 군주가 돼 중국 통일을 노린다. 그런데 군주라고 해서 하고 싶은 일을 무한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달 동안 내릴 수 있는 명령의 횟수가 제한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명성이다. 백성의 지지를 많이 받는 군주는 더 많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정치를 잘해서 이름을 얻으면 '행동력'이 늘어나는 게임이다. 게임 제작사 코에이는 삼국지5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백성의 지지에 따라 군주의 행동 가능 횟수가 달라지는 'Reputation'(명성) 시스템을 강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절묘한 정치 비유다. 지도자의 권력은 법률에 적힌 권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지도자를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달라진다. 현실 정치의 언어로 바꾸면 '정치적 자본'이나 '정당성'에 가깝다.

국민의 신뢰가 높은 정부는 큰 개혁을 추진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사회를 설득할 수 있다. 반대로 신뢰가 낮으면 작은 정책 하나에도 막대한 설명과 갈등조정의 비용이 들어간다. 삼국지5는 그것을 '명성' 수치라는 숫자 하나로 단순화했다.

킹덤 컴: 딜리버런스 2 게임 화면. 워호스 스튜디오(Warhorse Studios)
킹덤 컴: 딜리버런스 2 게임 화면. 워호스 스튜디오(Warhorse Studios)

◆30년 지나도 살아남은 원리…'킹덤 컴2'의 평판

이런 시스템은 옛날 게임에만 있을까.

아니다. 2025년 출시된 '킹덤 컴: 딜리버런스 2'에도 '평판'(Reputation)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마을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주민·상인·경비병 등이 플레이어를 다르게 대한다. 사람들을 돕고 신뢰를 얻으면 거래와 대화가 유리해지고 새로운 기회를 얻기 쉬워진다. 반대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람들의 미움을 사면 경비의 의심을 받고 거래나 인간관계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힘이 세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나를 믿기 때문에'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삼국지5가 군주의 명성을 '행동 횟수'로 표현했다면, 30년 뒤 게임은 평판이 거래·대화·기회 자체를 바꾸도록 훨씬 세밀하게 구현한 셈이다.

발더스 게이트 3 표지. 라리안 스튜디오(Larian Studios)
발더스 게이트 3 표지. 라리안 스튜디오(Larian Studios)

◆최신 게임은 한술 더 뜬다…"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여전히 좀 단순하다. '좋은 일을 한다→사람들이 좋아한다→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가 늘 성립할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2023년 세계적인 흥행작 '발더스 게이트 3'가 시사점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게임에서는 주인공과 함께 여행하는 동료마다 플레이어를 평가하는 '호감도'(Approval)가 따로 존재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모든 사람의 점수가 함께 올라가지 않는다. 한 동료는 좋아하지만 다른 동료는 싫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약자를 돕는 선택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냉정하고 실용적인 결정을 선호한다. 평판이 하나가 아니라 '멀티 평판'인 셈이다.

정치는 이쪽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 정부가 하나의 정책을 발표해도 농민·기업인·노동자·청년·노년층의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정부가 "국민이 원한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현실에서는 여러 개의 '민심 게이지'가 동시에 움직인다.

정부가 농지 전수조사에서 투기 목적의 농지법 위반만 처분하고, 상속농지와 관행적 임대차 등 투기와 무관한 농지법 위반은 처분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10월 8일 밝혔다. 이날 경기도 고양 일대 농지. 연합뉴스
정부가 농지 전수조사에서 투기 목적의 농지법 위반만 처분하고, 상속농지와 관행적 임대차 등 투기와 무관한 농지법 위반은 처분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10월 8일 밝혔다. 이날 경기도 고양 일대 농지. 연합뉴스

◆게임을 끄고 2026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 맞닥뜨리는 농지 전수조사

이쯤에서 게임기를 끄고 현실로 돌아와보자. 2026년 대한민국으로.

이재명 정부를 두고 보수 정치권과 일부 지지층에서는 최근 '폭주' '폭정'이라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나온다. 그 평가가 타당한지는 별도의 문제다. 다만 왜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농지 전수조사다. 정부는 올해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를 대상으로 소유관계와 실제 경작 여부, 휴경 여부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2027년에는 1996년 이전 취득 농지로 조사 범위를 넓힐 예정이다. 정부의 명분은 헌법상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원칙)을 바로 세우고 투기 목적 농지나 불법 임대를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고령, 상속,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경작 등 현실의 다양한 사정 때문에 "국가가 농지를 빼앗으려는 것 아니냐"는 불안까지 나타났다.

바로 여기서 울티마 V의 오래된 질문이 다시 살아난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단까지 자동으로 선해지는가.

공소청 출범을 사흘 앞뒀던 9월 29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작업자들이 맨홀 뚜껑에 새겨진 검찰 마크를 지우고 있다. 연합뉴스
공소청 출범을 사흘 앞뒀던 9월 29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작업자들이 맨홀 뚜껑에 새겨진 검찰 마크를 지우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청 폐지도 같은 질문을 남긴다

올해 대한민국 형사사법 체계도 크게 변했다. 78년간 존속한 검찰청이 사라지고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으로 기능이 나뉘었다.

그러면서 검사의 직접수사권도 폐지됐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수사와 기소를 분리해 검찰에 집중됐던 권력을 분산하는 개혁이라고 평가한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오랫동안 작동한 형사사법 체계를 너무 빠르게 바꾸면서 수사 공백이나 책임 소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기서도 같은 질문이 나온다. '검찰 권력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표와 '어떤 방식으로 개혁할 것인가'는 같은 문제가 아니다.

울티마식으로 말하면 좋은 '미덕'을 주장하는 것과 좋은 '통치'를 하는 것은 다르다.

이재명 대통령 X(엑스, 구 트위터)
이재명 대통령 X(엑스, 구 트위터)

◆'품격 있는 비판'은 누가 정하나…SNS에서도 다시 나온 질문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SNS 활동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떠올릴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은 국민의 제1공복" "정치와 권력은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며 소통을 강조하는 한편, 폭언·욕설·비아냥 등으로 공론장을 어지럽히는 계정은 차단할 수 있다는 취지로 '건전한 공론의 장'과 '품격 있는 비판'을 강조했다.

원칙 자체는 반박하기 어려운 미덕에 가깝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무엇이 '품격 있는 비판'이고 무엇이 '소통방해'인지, 그 경계를 누가 정할 것인가.

울티마 V의 블랙쏜이 던진 질문 역시 결국 이 지점에 있었다. 정직·정의·질서라는 가치가 나빠서가 아니라 권력자가 좋은 가치의 기준까지 독점하고 강제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이재명 대통령의 SNS 운영을 곧바로 블랙쏜식 통치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좋은 공론장을 만들겠다는 목적과, 그 공론장의 기준을 권력자가 직접 정하는 것은 같은 문제인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삼국지5 표지. 코에이(KOEI)
삼국지5 표지. 코에이(KOEI)

◆삼국지5라면 이재명 정부의 '명성'은 몇일까

그렇다고 반대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정책이 잘못됐다고 결론낼 수도 없다.

여기선 삼국지5가 조금 다른 답을 준다. 명성을 쌓으면 군주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현실 정치에서도 개혁을 많이 하고 싶은 정부일수록 역설적으로 더 많은 신뢰가 필요하다. 큰 권한을 가진 정부라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충분한 정치적 공간을 허용해야 큰 개혁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아무리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신뢰를 소비하기만 하면 어느 순간 '행동력'이 떨어진다. 삼국지5식으로 말하면 명성 수치는 무한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명성'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과도 조금 다르다. 지지율이 그 시점의 찬반을 숫자로 보여주는 지표라면, 정치적 명성이나 신뢰는 정책을 밀어붙일 때 국민이 얼마나 기다려주고 설명을 받아들이며 다음 선택까지 맡길 수 있느냐에 가까운, 보다 누적적인 자산이 아닐까.

◆발더스 게이트가 알려주는 더 불편한 사실

더 어려운 문제도 있다. '국민'이라는 한 명의 NPC(게임 속 비플레이어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농지 전수조사를 환영하는 사람도 있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검찰개혁을 더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형사사법 체계가 너무 빨리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발더스 게이트 3처럼 같은 선택을 보고도 사람마다 호감도가 다르게 움직이는데, 현실 민주주의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좋은 통치란 모든 사람의 호감도를 100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 것이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반대하는 집단이 왜 반대하는지 이해하고, 그들의 불안을 최소화하면서 정책 목표를 달성할 방법을 찾는 것이 정치의 영역에 가깝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월 8일 충남 안흥포구를 방문, 상인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월 8일 충남 안흥포구를 방문, 상인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좋은 일을 하려는 지도자'와 '좋은 지도자'는 같은가

울티마 IV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1985년 게임은 물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울티마 V는 다시 물었다. "좋음을 강제로 실현하려는 권력도 좋은가."

1995년 삼국지5는 한 가지를 보탰다. "백성의 신뢰를 얻은 군주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2020년대 게임들은 질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누구의 신뢰인가."

울티마 V의 통치자 블랙쏜.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울티마 V의 통치자 블랙쏜.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

40년 동안 게임이 발전시키고 다듬은 정치철학을 현실에 대입하면 이재명 정부에도 꽤 묵직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농지를 제대로 관리하고 검찰 권력을 개혁하겠다는 목적을 옳다고 믿는 것과, 그 목적을 국민이 신뢰할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은 같은가. 정부를 비판하는 쪽에도 반대 질문은 남는다. 불안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정책의 목적 자체까지 '악'이나 '폭정'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어쩌면 좋은 정부를 가르는 것은 목표의 선악만이 아닐 것이다. 좋은 목적을 갖고도 권력을 절제할 수 있는지, 반대하는 사람까지 설득하려 노력하는지, 잘못 설계한 부분은 수정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

삼국지5 식으로 표현하면 그래야 '명성'이 쌓인다. 킹덤 컴 식으로 표현하면 신뢰가 다음 행동의 기회를 만든다. 발더스 게이트식으로 표현하면 내 편이 아닌 동료의 호감도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울티마식으로 돌아가면 가장 오래됐지만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좋은 일을 하려는 지도자'와 '좋은 지도자'는 과연 같은가.

이재명 정부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았다. 이게 현실 정치를 다루는 게임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선택에 따라 엔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