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석민] 'No(노)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라는 환상

입력 2026-09-08 05:00:00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석민 선임논설위원
석민 선임논설위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난 4일 브리핑에서 "한반도 대비 태세에 큰 손상이 있지 않은 범위 내에서 (호르무즈해협 파병에 관한) 운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대외관계는 너무 예민해 백지장 차이로 다른 얘기가 되니 감안해 달라"면서 "파병(派兵) 얘기는 정말 어렵다. 진척된 게 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애매한 용어를 남발(濫發)하고 있지만, 이란전쟁과 호르무즈해협 문제에 관한 이재명 정부의 입장이 '남의 일에 내가 왜?'에서 '파병 검토·가능'으로 달라졌다는 해석이다. 당장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 좌파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일제히 "파병 반대"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 이를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중순 "한국 대통령에게 이란의 비핵화 노력에 동참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으나, 그들은 사양하겠다(No thanks!)라고 말했다"고 폭로한 이후, 5차례에 걸쳐 한국의 기여(寄與)를 압박했다. 결국 한국군 파병 검토는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이재명 정부가 굴복하는 모양새로 귀결되는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호르무즈해협 의존도나 국익(國益)을 감안할 때 실질적 기여를 하겠다는 입장을 쭉 표명해왔다. 실질적 기여는 군사적 기여도 포함하는 것"이라면서 "군사적 기여에는 전투(참여)도 있고, 비전투도 있고, 수색에 국한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이재명 정부의 대미(對美) 협상은 대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익을 위해 '호르무즈 파병'까지 고려한 한국 정부라면, 마땅히 현재 지지부진한 한미 관세 협상을 진작에 마무리했을 것이고, 무려 3천500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대미 투자 약속 부담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릴 각오를 한 동맹(同盟)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나라는 역사상 없다.

반면에 이재명 정부는 이란전쟁에서 미국의 동맹인 이스라엘을 오히려 비난하고, 이란 정권의 무자비한 자국민 학살에는 침묵하며, 이란의 지원 세력인 중국·러시아·북한을 많이 의식하는 행보도 보였다. 반미(反美)로 오해 살 수 있는 어깃장을 놓다가 현실에 직면해 태도를 돌변한 탓에 국익은 국익대로 손상받고 좌파 세력의 극렬한 반대를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다.

국력에 대한 착각과 환상은 국난(國難)을 초래한다. 1980년대 말 일본이 그랬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버블 경제가 정점에 달하자 자신감이 오만으로 변질, 이시하라 신타로(전 도쿄도지사)와 소니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 회장은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서 벗어나 일본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면서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미사일 등 미국 군사력의 핵심에 일본 반도체 기술이 필수'라면서 일본 없는 미국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하(貶下)했다. 하지만 현실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은 이미 미국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일본이 장악했던 반도체는 한국과 대만으로 이전됐고, 일본은 '잃어버린 시간, 30년+α'를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호르무즈 파병은 한국 사회의 운명적 갈림길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승리와 번영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반대의 길을 선택할지를 결정한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이재명 정부의 성패와 '삼전닉스' 대호황의 지속 여부도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