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전쟁사 상 가장 빛나는 승리 고구려의 살수 대첩
서양 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쟁은 서기전 216년 이탈리아 칸나이 평원에서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 섬멸한 칸나이 전투를 들 수 있다고 본다. 동양 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쟁은 어떤 전쟁을 꼽을 수 있을까. 중국 역사상에는 항우가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극단적인 퇴로 차단의 방법을 통해 5만의 군대로 진(秦)나라의 장감(章酣)이 이끄는 40만 대군과 싸워 이긴 거록(巨鹿) 전쟁, 조조가 2만의 군대로 원소(袁紹_)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관도(官渡) 전쟁, 동한 말년 손권, 유비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장강의 적벽에서 화공(火攻)을 통해 5만의 군대로 조조의 20만 대군을 몰살시킨 그 유명한 적벽대전 등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동양 역사상 병력 동원의 규모 면에서 최대의 전쟁을 꼽는다면 수양제 양광이 발동한 고구려와의 전쟁을 들 수 있다.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612년(고구려 영양왕 23년) 동북방의 강자 고구려를 복속시키겠다는 야심을 품고 호왈 200만, 실제는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수서(隋書)』 양제본기는 그 당시 수군의 병력 규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 113만3천800명으로 호왈 200만이라고 하였다. 거기에 보급부대는 그 배나 되었다. 계미일에 제1군이 출발하였는데 군사가 모두 출발하는 데만 무려 40일이나 걸렸다.(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 癸未第一軍發 終四十日 引師乃盡)"
이는 당시 수나라의 전투병력이 113만3천800명이고 후방의 보급부대까지 모두 합치면 300만 대군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전군이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동양 전쟁사 상 유례가 없는 대군의 동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살수(薩水)에서 고구려군에게 대패를 당한 것이다.
살수대첩이란 수양제의 제1차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대 즉 요즘으로 말하면 특전사 같은 부대를 살수에서 수장시켜 거둔 대승을 말한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치기 위해 건너온 살수의 상류에 보를 쌓아 물길을 막고 강을 건너 퇴각하던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앙에 도달하자 막았던 보를 터뜨려 수공(水攻) 작전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정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한니발이나 제갈공명 못지않은 전략이 뛰어난 장수였다. 패전을 가장해 평양성 가까이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였고, 저들이 꼬임에 빠진 것을 자각하고 퇴각하여 살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매복해두었던 고구려 군대를 발동하여 맹공을 퍼부어 수나라 별동대는 이로 인해 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이때 수나라의 특수부대 병력은 30만5천명이었는데 살아서 돌아간 군인은 겨우 2천700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그 참상은 가히 짐작이 간다.
살수대첩에 참여한 고구려 군인의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는 고대 문헌에 밝혀져 있지 않은데 현대 중국의 역사학계는 약 1만여 명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 백제가 전성기에 "강력한 군대가 100만이었다.(强兵百萬)"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적어도 몇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살수대첩은 최소의 군대로 최대의 적군과 맞서 싸워 이긴 동아시아 전쟁사 상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국 역사상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고구려 살수의 위치
한양조선의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에서 배 13척으로 왜적선 133척을 물리치는 장거를 이룩했다. 그래서 우리는 충무공의 동상을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 민족의 표상으로 추앙한다.
그러나 중국의 300만 수나라 대군을 상대로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고구려, 그 승리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살수대첩은 한국의 전쟁사를 넘어 세계전쟁사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이다.
강대한 고구려제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살수대첩은 우리 한민족의 자랑으로서 두고두고 칭송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사의 가장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살수대첩은 오늘날까지 그 정확한 전투 위치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래에서 먼저 살수의 위치에 대한 한, 중 역사학계의 지금까지 관점을 살펴보고 이어서 필자의 견해를 『사고전서(四庫全書)』 사료를 바탕으로 제시함으로써 한국사 최대 미스터리 살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한다.
◆살수에 대한 중국 역사학계의 입장
중국의 현대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살수를 북한의 청천강으로 본다. 웅무일(熊武一), 주가법(周家法)이 편찬한 『군사대사해(軍事大辭海)』(장성출판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612년 6월 수양제는 우문술을 파견하여 여러 장수와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한 다음 수군(水軍)과 함께 합세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협공하도록 하였다. 압록강 서쪽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에서 대신 을지문덕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위해 싸우면 번번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따라서 우문술 등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다 이겼다. 그러나 수나라의 병졸들은 지쳐있었고 평양성은 험고하여 공격해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항복을 받아들여 퇴각하게 되었다. 7월 24일 살수를 건너는데 수나라 군대가 절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후미를 공격했고 여기서 수군은 궤멸을 당하였다."
이는 압록강을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 살수를 평양성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청천강으로 인식하고 있는 중국 역사학계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살수에 대한 한국 반도사학의 주장
한국 반도사학의 살수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이병도는 『한국사-고대편-』(을유문화사) 『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등에서 모두 "살수(청천강)" 즉 고구려의 살수는 북한의 청천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조를 번역할 때는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이고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기백과 이기동 역시 고구려의 살수를 지금의 청천강으로 인정하였다. 예컨대 『한국사강좌1』(일조각) 고대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수양제의 대규모 침략군을 살수(청천강) 전투에서 격멸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이병도, 이기백, 이기동은 한국의 반도사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이들이 광복 후 제도권 사학을 주도하였으므로 한국의 중,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살수는 청천강이라는 반도사학의 견해를 따라 그대로 기술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살수에 대한 한국 민족사학의 주장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제9편에서 「살수전(薩水戰)」이란 제목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을지문덕은 이때 이미 대동강 싸움에서의 승전보를 들었고 또 우문술 등 수군에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필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니 우문술 등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사람들은 하잘 것이 없구나'하며 내리 길게 몰아쳐 와서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위의 기록에서 민족사학자 단재는 반도사학과 동일하게 패수를 대동강, 살수를 청천강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위당의 『조선사연구, 상』(연세대학교출판부)을 살펴보면 살수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서 보이는데 살수의 위치에 대하여 "살수는 지금 안주(安州) 청천강이다"라고 말하였다.
민족사학을 대표하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가 모두 살수를 지금의 북한 청천강으로 인식하여 반도사학과 큰 차이가 없음을 볼 수 있다. 민족사학을 계승한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일지사)에서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라고 말하여 역시 반도사학과 동일한 견해를 나타냈다.
반도사학과 각을 세우며 민족사학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이덕일 또한 2003년 발행한 『살아있는 한국사1』(휴머니스트)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였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살수는 청천강으로 추정한다"라고 말하였다.
다만 이덕일은 최근 『대한민국역사교과서』(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펴낸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살수의 위치를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보지만 수군이 살수를 남쪽으로 건넜던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건넜다는 점에서 동서로 흐르는 청천강이 아니라 남북으로 흐르는 대륙의 강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학계는 요동반도에서 바다로 흐르는 대양하(大洋河)의 지류인 소자하(哨子河·초자하)로 보고 있는데, 이보다 더 서쪽의 강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학계는 『조선전사 3』(과학백과사전출판사) 중세편 고구려사 조항에서 "적장 우문술이 살수를 건널 때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던 만큼 살수는 평양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었다. 살수는 대양하의 큰 지류 소자하로 볼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덕일은 북한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존에 청천강을 살수로 추정했던 견해를 수정하였다. 그러나 북한학계는 살수를 소자하로 추정한데 반하여 이덕일은 "이보다 더 서쪽의 강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하고 살수가 구체적으로 지금의 어느 강인지 그 위치를 단정하진 못했다.
이는 살수가 북한의 청천강이나 요녕성의 소자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떤 강이 살수인지 꼭 집어서 말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이해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중국의 역사학계와 한국의 반도사학은 고구려의 살수를 북한의 청천강으로 보는 견해가 확고하다. 한국의 민족사학 또한 반도사학과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북한학계에서는 살수는 평양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북한 청천강 살수설을 반대하고 요녕성 대양하의 지류인 소자하 살수설을 제기했다.
한국의 이덕일은 청천강 살수설에 반론을 제기하되 아직까지 자료의 뒷받침을 통해서 반도사학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확고한 자기 관점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