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의용군 입대…호국의 대열 앞장
산업화 인재 6만 명…조국 근대화의 선봉
대구공고 동창회로부터 '제5공화국'을 주제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어떤 화두를 주제로 강연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6·25 전쟁 때 대구공고(당시는 6년제 대구공업중) 재학생 273명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들고 학도의용군에 입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60년 4·19의 도화선 역할을 한 2·28 대구 학생민주화운동 때도 대구공고 재학생이 대거 참여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호국의 대열에 앞장서고, 불의와 투쟁하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선 전통의 명문이 대구공고였다.
대구공고는 그동안 산업화 인재 6만 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항제철과 구미전자산업단지, 울산 석유화학·조선 단지, 창원 기계공업단지 건설에 참여하여 조국 근대화의 선봉에 섰다.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추진 과정에서 대구공고가 기여한 공헌은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대구공고에서 연마한 기술을 기반으로 풍산그룹(류찬우), 귀뚜라미 그룹(최진민), 삼일방직(노희찬) 등을 창업하여 국민 생활수준 향상과 안보 분야에 기여하는 스타 기업인도 다수 배출했다. 게다가 전두환·노태우(중도에 경북고로 편입학) 두 명의 대통령이 대구공고 출신이란 점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과 대구공고 인맥이 한국의 선진국 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1980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한국은 제2차 석유위기로 심각한 불황에 처해 있었다. 중화학공업 하나만으로는 안정적인 경제 성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신성장동력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즉시 당대 최고 전문가 그룹이 참여한 태스크포스가 꾸려졌고, 6개월의 연구 끝에 '전자산업 진흥방안'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핵심 내용은 불황 타개와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반도체·전자교환기(TDX)·슈퍼컴퓨터를 국산화 개발하여 정보통신산업(IT)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전문가들의 제안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리고 IT산업을 '제2의 성장 동력'으로 건설키로 결심한다. 세계 선두를 달리는 선진국들도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있는 IT 분야에 겁도 없이 도전한 것이다.
◆대구공고 출신 최순달이 TDX·반도체 개발 주역
가장 먼저 전자교환기(TDX) 개발에 나섰다. TDX 개발 책임자로 선정된 사람은 대구공고 출신 최순달 박사였다. 그에게 240억 원의 개발비가 주어졌다. 정부 연구개발사업비 최대 액수가 10억 원에 불과했던 시절, 240억 원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최순달이 지휘한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는 목숨 걸고 이 대업을 성취해냈다. 전두환 정부의 과감한 투자로 TDX 국산화 개발에 성공한 덕분에 한국은 정보통신 강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뚫렸다.
TDX 개발 진행과 동시에 전두환 정부는 1981년 5월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을 수립했다. 반도체를 국산화하여 미래 성장산업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전략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우리의 선진국 진입 여부는 반도체 기술을 얼마나 빨리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국무위원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 협력하라"고 두 차례나 발언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내 전문가, 외국 연구기관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기술과 자본 부족, 좁은 내수시장, 전문 인력 부족으로 수출경쟁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암울한 전망과 예상이 판을 치자 기업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이래선 안 되겠다고 판단한 전두환 대통령은 TDX 개발을 지휘하던 최순달 박사를 체신부장관에 임명한다(재임기간 1982년 5월~1983년 10월). 당시 국내 유수의 전자 기업들은 정부에 교환기를 납품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교환기 배정 권한은 체신부 장관이 쥐고 있었다. 전 대통령이 최순달을 체신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교환기 납품권을 무기로 기업들을 압박하여 반도체 사업 참여시키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최순달 장관은 교환기를 생산하는 재벌 회장들을 직접 면담했다. 그리고 정부가 전략사업으로 육성 계획을 수립한 반도체 사업 참여를 '정중하게' 권고했다. 이렇게 되자 이병철 삼성 회장을 필두로 정주영(현대), 구자경(LG) 회장 등 대기업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1983년 2월 8일 이병철 회장이 삼성의 반도체 사업 참여를 선언하는 '도쿄 선언'을 발표한다. 정부가 교환기 납품권을 무기로 기업들 등을 떠밀어 시작한 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진짜 역사다.
삼성이 경기도 기흥에 VLSI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산림보존지역·농지·상수도 보호지역이란 이유로 농림부·건설부 등 관계부처가 용도 변경을 강력 반대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모든 규제를 풀어준 덕에 세계적인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들어섰다. 현대전자(SK 하이닉스)의 이천 공장 부지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통 큰 결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삼성이 반도체를 본격 생산하자 미·일 기업들은 덤핑 공세로 시장을 교란했다. 삼성은 막대한 적자 누적으로 그룹 전체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 1MD까지는 겨우 버텨왔는데, 4MD 개발은 엄두를 못 냈다.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전 대통령은 4MD 개발비 전액(개발비 400억, 기자재 구입비 479억)을 정부가 부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신 기업들도 연구 인력을 참여시켜 공동 개발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로써 4MD램 개발은 '대통령 프로젝트'로 명명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을 17일 앞둔 1988년 2월 8일 4M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나가는 고속도로가 뚫린 날이다.
전두환은 5공에서 시작된 반도체 개발이 중단되지 않고 6공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원했다. 전두환의 간절한 메시지를 전달받은 노태우 대통령도 정부가 반도체 개발비를 부담하는 방식으로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그 결과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반도체산업과 관련하여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역할은 신화처럼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반면에 반도체산업 육성 정책을 수립하고, 기업들 등 떠밀어 참여시키고, 용도 변경으로 공장 건설을 허가하고, 4MD램 개발비를 정부가 투입하는 결단을 내린 전두환의 역할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고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원전 국산화 주역은 대구공고 출신 박정기
전두환 대통령의 다음 도전 과제는 전력의 안정적 공급이었다. IT산업의 핵심 동력원은 전기다. 한국 상황에서 가장 저렴하고 안정적이며 풍부한 전력 공급원은 원자력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1978년 4월부터 운전을 시작한 고리 1호기가 유일했다. 고리 2호기·월성 1호기(중수로)는 건설 중이었다.
한국은 원전 관련 기술이 없어 외국 업체들이 설계·시공·기기제작·시운전까지 마친 후 인도받는 턴키 베이스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폭증하는 전력 수요 공급이 불가능하다. 결론은 원전 국산화였다. 하지만 원전의 산업 전망은 지극히 불투명했다. 1979년 3월 28일 미국 스리마일 섬(TMI) 원전사고로 세계는 신규 원전 건설 중지, 가동 중인 원전 폐쇄 등 패닉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공고 출신의 전두환은 과학기술을 확신했다. 원전 공포증으로 난리가 난 한복판에서 전두환은 원전을 수출 산업으로 키워 제3의 성장 동력으로 육성키로 결정했다. 5공 정부는 1981년 2월 19일 영광 1·2호기, 1982년 3월 5일 울진 1·2호기를 연이어 착공했다.
어떤 난관이라도 뚫고나가 원전 국산화 결심을 굳힌 전두환은 1983년, 대구공고 출신이자, 자신의 육사 후배인 박정기를 한전 사장에 임명한다. 그리고 "육사 출신이 전쟁하듯 목숨 걸고 원전과 핵연료를 국산화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박정기는 목숨 걸고 원전과 핵연료 국산화를 추진했다.
한국이 원자로 개발을 위한 총력전을 전개하던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원자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전 세계에 탈원전 광풍이 불었다. 전두환 정부는 체르노빌 사고로 원전 공포가 극에 달한 난국을 뚫고 "영광 3·4호기 원전 계속 건설"을 선언했다. 이렇게 되자 세계 원전 기업들은 한국 원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박정기 사장은 영광 3·4호기 국제 입찰에 "우리가 원하는 원전 원천기술 100% 전수"를 못 박았다. 존폐 위기에 몰린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이 모든 특허권 제공 등 파격적이고 전폭적인 기술이전을 약속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은 원전 핵심 분야의 설계 기술, 핵연료 제조기술을 이전받아 한국형 원전 개발에 성공한다. 나아가 한국형 원전을 부단히 업그레이드한 모델(APR-1400)로 UAE와 체코에 원전 수출에 성공했다. 원전 국산화의 사령탑 역할을 맡았던 박정기의 회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가 에너지 장래에 대한 원모(遠謀)와 원자력에 대한 심려(深慮)가 없었다면 원자력 기술 자립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거두어 퇴로는 막고, 오직 돌격을 계속하여 목표를 점령할 수 있게 한 분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IT산업, 원전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 나라로 발돋움하는 주인공들을 배출한 대구공고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펜앤마이크 대기자






